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얼른 끝내고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어떤 이야기보다 더 궁금했다.
“우리가 묵고 있는 마을 뒷산에 영국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날이 새면 영국군 주변을 맴돌았다. 그 곳에서 먹을 것을 얻을까 일말의 희망을 갖고 배회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군인들이 북쪽으로 갔다가 밤에 돌아오는데 낮에 보초병이 몇 명 있고 모두 앉아서 총을 어깨에 맨 채 껌을 씹으며 졸고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 나와 할아버지는 철망에 걸려있는 담요를 걷어왔다. 말하자면 도둑질을 한 것이다. 때로는 식당 근처에서 배회하며 기회만 있으면 식빵을 훔쳤다. 그것으로 겨우 끼니를 때웠다.
그런데 부대에서 집집마다 수색을 한다고 해서 이불을 뜯어 그 속에다 담요를 넣어 감추고 이불을 꿰매셨다. 할머님은 두루마기 속에 둘둘 말아 감고 이웃 동네에서 쌀 반말 하고 담요 한 장을 바꾸어오셨다. 그야말로 부자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식구가 많아 최대한으로 아껴 죽을 쑤어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영국군이 할아버님을 트럭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가셔서 식구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틀 뒤 할아버님이 돌아오셨다. 부역을 하다가 노인이라고 돌려보냈다고 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이 우리 군이 서울을 재탈환했다는 소식에 우리도 갈 채비를 하여 그 길로 부곡까지 왔다. 부곡에 와서 철도 관사 내 방을 구해 묵기 시작했다. 날은 춥고 먹을 것은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님과 나는 수원으로 무작정 식량을 구하러 누비고 다녔다.”
전쟁 시작 3일 만에 서울 함락에 이어 9.28 서울 수복,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와 다시 서울 재탈환 등 알 수 없는 전쟁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그 힘든 피난 생활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죽기 아니면 살기였을 그 힘든 피난 시절을 생각하니 갑자기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감사했다. 이렇게 풍족하게 먹고 침대에서 편히 자는 우리들이 죄송했다. 한국전쟁을 도운 나라들이 많은데 영국군도 만났구나 싶었다. 프랑스, 터키, 캐나다, 호주, 필리핀, 남아공, 이디오피아 등 20개국이 넘는데 전투 지원이 16개국,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 등 5개국은 의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너무 고마운 나라들이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무기를 공급해주고 목숨을 걸고 참전해서 우리나라를 위해 치열하게 싸운 일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참전 용사들을 위한 행사도 자주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에 초대했을 때 발전된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는 참전용사들의 모습을 TV로 본 적이 있는데 소감을 물으니 뿌듯하고 감격스럽다고 했다. 피폐해진 나라가 이렇게 큰 발전을 한 것을 보고 오죽하면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을까. 갑자기 우리나라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엄마는 할아버지 일기장에 빠져있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진짜 잘 쓰셨지?”
“네. 엄청이요. 11살밖에 안됐는데 어떻게 이렇게 기억이 잘 나셨을까요?”
“그러게. 잊기 힘든 극한의 고통이어서가 아닐까?”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너무 어릴 때 일이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다음 날 할머니 집에 가게 되어 할머니께 전쟁 당시 기억이 나는지 여쭈어보았다. 할머니는 충청도 청주 시골에서 사셔서 할아버지 보다는 전쟁을 많이 실감하지 못 하셨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피란을 가는 대신 뒷산에 가서 굴을 파서 숨어 지냈다고 했다. 할머니 온 식구도 마을 뒷산에 가서 굴을 파서 피신을 하고 증조 외할머니만 집에 남아 밥을 해서 산으로 날랐다고 했다. 그리고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할머니가 다니던 국민 학교가 폭파되어 잿더미가 되었다고 했다. 할머니도 어릴 때라 너무 무서웠다고 하셨다. 인민군이 남쪽까지 진군해서 온 국민이 피할 길이 없었던 끔찍한 전쟁이었다. 집으로 가서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