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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j Jul 05. 2024

슬기로운 신혼 생활


살면서 가장 아쉬운 시간이 있다면 신혼 시절이다. 졸업 후 사회생활 2년을 하고 난 25세. 남편은 30세에 결혼을 했다. 연애기간 4년 만이다. 난 이른 나이였지만

결혼할 비용만 벌고 퇴사할 때 큰 아쉬움이 없었다. 그 당시는 결혼하면 퇴사가 일반적이어서 당연히 받아드렸다. 오히려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이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거란 기대감에 부풀었다.


오산이었다. 시댁에서 잠시 살고 분가하면 좋겠다는 시부모님의 말씀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세라도 얻어달라고 남편에게 떼쓰지도 않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25세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나로선 새로운 가족들과 살면서 겪게 될 어려움을 그 땐 몰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었다.


10월에 결혼하고 두 달 결혼 생활을 하니 도피처가 필요했다. 시부모님이 불편해선 아니지만 긴 시간을 종일 함께 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집안 일, 식사 준비는 할 만했지만 이른 아침에 출근해 저녁 늦게나 오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종일 부모님과 함께 있는 건 힘들었다.


외출을 할 데도 없었고 가까운 친정에 자주 가는 것도 눈치 보였다.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면 괜히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입덧이 심했던 형님이 둘째 출산 전후로 함께 지내게 되면서 대식구 식사 준비와 뒷정리가 만만치 않았다. 음식은 어머님이 하시고 뒷정리만 했어도 시동생까지 5식구에 형님 내외와 3살 딸. 모두 8식구였다. 출산 후 산후조리에 두 아이들 양육까지 오랜 시간 함께 지냈다.


부모님이 안방을 난 신혼방 두 개를 쓰고 시동생이 쓰던 방에서 형님 부부가 지내고 시동생은 거실 신세가 됐다. 형님은 나와 잘 맞아서 아침이면 커피도 마시고 두런두런 대화도 나누고 3살 조카의 재롱도 보면서 무료하지 않아서 좋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답답했다.


대식구 속에서 자라 크게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만 바라보고 낯선 환경에서 혼자 견디는 신혼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자가로 사시는 형님이 부러웠다. 주말이면 집에 갔다가 다시 오기를 반복하시는 걸 보고 급기야는 남편에게 "차라리 형님네가 들어와 살지. 이게 뭐야!" 힘들다는 원망까지 하게 되었다.


내 불평을 말없이 받아주고 다독이는 남편 덕분에 견뎠다. 조금씩 환경에 적응 되었지만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임신을 바로 했어도 탈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결혼 두 달 만에 가까운 속셈학원에서 일을 잡았다. 그 당시에는 초.중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속셈학원이 많았다. 마침 아파트 상가에 있는 학원이라서 편했고 오후에만 일하니 숨통이 틔였다.


부모님도 일하는 며느리를 애쓴다고 대견해 하셨고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도 잘 맞았다. 중1 국어를 가르치면서 신설된 초등 논술까지 맡게 되었다. 꿈이 교사였던 만큼 즐겁게 일했다.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문제는 임신 사실을 숨기고 일하다 보니 불러오는 배를 감출 수가 없었다. 7월이 출산이어서 바바리 코트로 최대한 몸을 가리고 일했다. 그 당시엔 몸이 말라서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여름으로 들어서자 원장님께 사실을 알리고 출산 일주일 전까지 수업을 했다.


출산을 하니 부모님과의 관계는 훨씬 편해졌다. 아기를 돌보기 힘들 때 양육을 많이 도와주셨고 함께 공유할 아이가 생기니 심심할 틈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생명체에 온가족이 웃음꽃이 피었다.


마침 미분양 아파트에 당첨되어 입주를 기다리며 2년을 함께 살고 첫째가 돌이 되었을 때 분가했다. 아파트 동호수 추첨하러 가면서 몇 개월도 안된 아들에게

 "아들, 우리집 생겼다!"

하며 좋아서 펄쩍 뛰었다.


친한 친구가 결혼하고 따로 살다가 연년생 둘을 낳고 양육이 힘들다고 합가를 선택할 때 내가 잘 생각해 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남편보다 시부머님을 더 많이 의지하던 친구이기에 좋았던 사이가 오히려 나빠질 수 있으니 신중히 선택하라고 했다. 그럴 리 없다던 친구도 꽤 오랜 시간 시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겪었다. 아무리 좋은 관계여도 함께 살면 크고 작은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두고두고 후회하던 친구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부모님은 큰 아주버님 사업을 도와주기 위해 시골로 내려가시고 우리는 분가를 했지만 시동생의 거취가 없어 당분간 함께 살기로 했다. 분가만으로도 기뻐 시동생 한 명쯤은 충분히 건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오산이었다.


시부모님과 살 때보다 더 불편하고 힘들었다. 남편과 7살 차가 나는 시동생이 금방 장가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6년을 함께 살고도 결혼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골에 내려가신 부모님은 이런저런 일이 많으셔서 자주 올라오시면 며칠씩 집에서 지내셨다. 우리집이 편하신지 형님네집보다 우리집에만 오시고 최장 한 달 가량 계신 적도 있었다. 그 때 둘째 출산 한 달을 앞둔 만삭의 몸인데다 한여름에 좁은 집에 와 계신 시부모님의  식사 준비로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었지만 내색도 못했다. 가장 힘들었을 때였다.


시동생 문제로 속앓이를 하면서도 시부모님껜 말도 못 꺼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집을 넓히면서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전세 주고 작은 빌라로 이사했다. 그제서야 시동생의 거취를 마련해주신 부모님이셨다. 그 뒤로도 몇 년을 혼자 살다가 35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으니 내 선택은 옳았다.


둘째도 태어나고 작은 빌라에서 네 식구가 처음으로 오붓하게 살아봤다. 집은 작았지만 그 편안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집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분을 처음 느껴보니 정말 홀가분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알콩달콩 신혼 생활을 보내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지만 시부모님과 함께 지낸 덕분에 진정한 가족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참고 인내하는 법도 덤으로 배웠다. 어머님은 시동생을 오랜 시간 말없이 데리고 산 일을 지금까지도 고맙다고 표현하신다.  돌이켜 보면 그 땐 힘들었지만 살다보니 더한 일도 겪는데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느덧 흘러온 30년. 지금은 둘만 남았지만 절대 신혼 생활이 될 순 없다. 소꿉장난 같았을 신혼의 달콤함과 설레임을 누리진 못했어도 지금의 편안함과 서로에 대한 익숙함과 친밀함도 충분히 가치있다. 지금 생각해도 슬기로운 신혼 생활을 보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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