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부는 참 강한 사람이다. 벌써 환갑을 지나신지 두 해나 지났지만 염색을 안 해도 흰머리가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롤러코스트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맘 고생을 하시고도 참 신기한 일이다.
형부가 신설동에서 인쇄업 일을 하실 때 언니와 소개로 만나 35년 전에 결혼했다. 워낙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데다 술. 담배도 전혀 안하시는 형부였다. 23살에 5살 차이가 나는 형부와 결혼한 언니는 부평 작전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아기도 늦게 생겨 무척 무료했던 언니는 학교가 인천이었던 내게 언니네서 학교를 다니라며 권유했다. 형부도 너무 잘해주셔서 주말에만 집에 가고 덕분에 2학년 때부터 편안하게 학교에 다니면서 교생 실습까지 잘 마칠 수 있었다.
졸업 후 사회생활 2년 만에 결혼하고 2년 만에 25평 아파트를 분양받아 시댁에서 분가하면서 부평에 사는 언니를 내가 사는 곳으로 이사오게 했다. 마침 형부도 인쇄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까운 곳으로 사업장을 잡았다.
우리 첫째와 유산의 아픔을 겪고 5년 만에 얻은 언니 아들이 동갑이어서 우린 두 아들을 함께 키우다시피 했다. 두 아이들도 친구이자 사촌이라 지금까지도 끈끈하다. 형부 사업도 잘 됐다.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오후에 아들을 돌봐준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언니에게 너무 고맙다.
형부의 사업이 잘 되자 25평에서 32평 아파트로 이사간 언니가 부러웠다. 집도 멀어져 그때부턴 엄마 집 근처로 이사를 해서 첫째는 유치원에, 둘째는 엄마의 도움으로 일을 계속 했다. 언니의 둘째가 딸이어서 아들이 쓰던 고급진 장난감에 옷. 신발까지 물려받아 우리 둘째는 그야말로 거저 키웠다.
돈을 잘 안 쓰시는 형부지만 차와 가전에 관심이 많으셨다. 외제차에 고가의 가전을 수시로 바꾸시면서승승장구하셨다. 다시 분양받은 아파트의 중도금이 부족할 때도 선뜻 빌려주어 인정 많은 언니와 형부의 덕을 많이 봤다.
호사다마였을까. 사업장에 불이 나면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화재 보험을 들어 다시 시작했지만 이번엔 크게 부도를 맞으면서 사업을 접어야 했다. 형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필리핀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려고 기계를 사들였다. 하지만 사기를 당하면서 빚더미에 앉고 급기야 집도 팔아 전세로 갔다. 신용 불량자가 된 형부는 파산 신청으로 회생 절차를 밟았다. 그때 가장 마음 고생을 크게 하던 언니와 형부를 옆에서 지켜보기 너무 힘들었지만 어쨓든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신혼 때부터 자가로 살던 언니가 처음 전세로 살다가 형부를 대신해 일을 시작하면서 아직 어린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부모님과 합가했다. 생활비를 드리고 결혼 전까지 했던 경리일을 찾아 마트. 주유소. 우유 사업소 등 가리지 않고 오랫동안 일했다. 형부는 큰 형부의 권유로 타워크레인 기사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따면서 열심히 일해 회생 절차를 통해 갚기로 한 빚을 5년간 다 갚고 신용 불량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니 부부 사이가 나빠져 위태했을 때도 있었다. 필리핀에서 무일푼으로 돌아왔을 때 최악의 상황이었다. 우리 형제들이 똘똘 뭉쳐 옆에서 힘을 주었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부모님 집에서 분가하며 25평 아파트를 다시 마련했을 때 형부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부모님 집에선 내가 봐도 기를 못 피던 형부여서 늘 안쓰러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참고 견딘 형부는 참 무던한 사람이다.
월급이 오르면서 금방 돈을 모으고 내 권유로 사놓은 빌라가 재개발 되면서 아파트와 빌라를 팔아 35평 같은 아파트 옆동으로 이사 오게 됐다. 뿌듯해 하는 형부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형부가 이사오자마자 대장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정확히 직장암으로 크기도 커서 선항암에 수술, 후항암을 거치고 장루에 나중에 제거까지 2년 간 투병을 해야 했다.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제야 살만해졌는데 현실이 참 가혹했다. 하지만 형부는
"이또한 지나가리라"
하시면서 그 힘든 투병 과정을 버티셨다. 투병 2년간 언니가 들어두었던 보험 진단금이 꽤 많아서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어 이 또한 감사했다.
2년 만에 복직해서 첫 월급을 형부에게 받은 언니는 눈물을 흘렸다. 피같은 돈을 어떻게 쓰냐며 두 부부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서로 애틋해졌다. 6개월마다 정기 검진을 받으시고 건강을 회복하신지 5년이 넘었다. 지금도 현장에서 성실히 일하고 계시는 형부를 볼 때면 참 고맙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에게 왜 힘든 시련이 자꾸 찾아오는지 처음엔 원망도 많이 했다. 견딜만한 시험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위안을 얻고 이사오신 뒤부터 우리 부부의 인도로 교회에 다니시면서 아플 때도 믿음으로 잘 극복해내셨다.
한번은 항암이 끝나고 예배를 드리다가 기력이 쇠해진 탓에 쓰러져서 119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걱정되어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울며 기도했다. 형부 믿음 대로 모든 것이 지나갔다.
이제 내년 봄이면 제법 큰 기업에 다니는 큰아들이 결혼하고 작은 딸도 백화점 매니저로 일하면서 평안한 삶을 살고 계시다.
화재 사고. 사기. 파산. 암투병. 고비고비가 너무 많아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버티셨다. 가장으로서 말없이 최선을 다하시고 무거운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형부는 참 강직한 사람이다.
아무쪼록 건강하기만을 늘 기도한다. 언니와 형부의 삶이 롤러코스터처럼 굴곡지고 아슬아슬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안정이 주어졌다.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언니 부부의 가정에 축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