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상담-1
아주 희안한 일이다. 퇴사 계획을 말한 이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쉬어지지않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 소식이 단 하루만에 약국 내에서 일파만파 퍼지면서 모두가 알게 되었음에도, 그 시선에 기꺼이 당당해졌다. 물론 힘이 아예 안 드는 당당함은 아니었지만.
실장님은 내가 한 공간에 있음에도 다른 약사님과 새로운 약사를 뽑아야하는 이유를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처음 들어왔을때도 버젓이 내 앞에서 ‘딱 1년차 실력인데요, 뭘.’ 이라며 떠들더니… 당사자 앞에서 당사자가 없는듯 이야기하는 나쁜 버릇은 언제 생긴걸까 대체.
그럼에도 이미 퇴사는 정해졌고, 내가 날 위해 쉴 수 있다는 주도성이 생기니 그런 앞담화를 예전보단 가볍게 넘겼다. 뭐랄까.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 상관안해. 라는 마인드였다.
퇴사를 이야기하고 다음날 아침 조제실에서 생각보다 기운차게 일하고 있었는데, 상무님이 나를 호출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1층으로 내려가 상무님과 나란히 앉았다.
‘썸머약사, 퇴사하는 이유를 솔직히 얘기해줄 수 있나요?’
솔직한 이유는 ‘쉼’이었다. 가슴이 계속 답답하고 숨이 안 쉬어지는데, 뭘 더 할 수 있을까. 집에 가면 겨우 마음을 쓸어내리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던 이유는 사람이 될 수도, 환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 이유는 중요치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어 이곳을 선택했기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을 뿐임을 알게 되었으니.
그럼에도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나는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저 회사나 NGO를 도전해보고 싶어서요. 제가 벌써 삼십대 초반인데 시간이 계속 가다 보면 그런 기업에서는 저를 뽑아줄 가능성이 너무 적어질 것 같아서요.’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도 아니었다. 이번 쉼은 내가 나를 돌보며 내가 원하는 선택에 집중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래요, 약사님. 나는 그냥 3개월이란 시간을 커리어로 치기엔 너무 짧고 부모님이 걱정하실 테니까 말씀드리는 거에요. 아깝잖아요.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말해줘요. 계속 일하는 건 문제가 안될 거에요.’
이 때 조금 놀랐다.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이야기해달라니. 권고사직을 당했던 내가 이곳에서는 붙잡고 싶은 사람 중의 한 명이 되어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배들에게 면박을 듣느라 내가 현저히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있던 때였는데...
당연히 나는 내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었다. 어떻게 먹은 마음인데… 내가 내 마음을 이렇게까지 존중해주고 싶은 적은 처음이었기에 감사하다 말씀드리고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느낌일 수도 있겠다. 약국에 퇴사이야기를 한 이후, 사람들이 나를 조심스러워하며 좀 더 나이스하게 대해준다. 내가 좀 당당해져서 그런 기분이 든걸까. 좀 편해진 동료분들에게는 먼저 다가가 들으셨죠? 하며 내가 퇴사를 결정하게 된 이유를 말씀드렸다. 이런 상황만으로도 인생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온 기분이 들었다.
‘썸머씨 이제 거의 한달 남았죠?’
‘네, 근데 상무님이 약사를 못 구하면 8월 말까지는 다녀달라고 하셔서 그럴려구요. 저도 금전적인 부분이 제일 걱정이긴 해서요.’
‘이제, 웃지 않는 연습을 해보셔야할 것 같아요.’
‘…? 네?’
‘썸머씨가 허락해준 덕에 브런치스토리 글을 읽어보았어요.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어요. 특히 아파도 웃으면서 선생님한테 조퇴하겠다고 한 글을 보았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말해주고 싶었어요. 상담을 하러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봐온 썸머씨는 참 웃음이 많긴 했어요. 근데 꼭 그러지 않아도 돼요.’
불안하거나 어색할 때는 그걸 티 내면 사람들이 불편해할까 오히려 더 웃었다. 웃으니까 사람들이 밝아보인다며 좋아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곧바로 웃어버렸다. 심지어는 나도 나중엔 내가 그냥 밝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으니. 나아가 좋지 않은 상황을 웃음으로 무마하니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좋은게 좋은거라면서. 그만큼 고착화된 웃음이었다.
‘와, 지금까지 들었던 솔루션 중에서 제일 어려워요. 제 디폴트값이 웃상인데요…? 제 장점을 잃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썸머씨는 지금까지 계속 사람들 시선에 맞추어 살아왔어요. 지금 느끼는 감정을 숨기는 것은 잘 연습이 되어있으니 이제는 지금의 감정 상태를 내비치는 연습을 해봅시다. 너무 어려우면 이 상담실 안부터 시작해봐요.’
‘선생님, 지금은 선생님 좋으니 이렇게 웃는건데요…?’
‘그렇다면,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시원하게 할말 하는 것도 좋아요. 웃으며 넘어가지 말고. 욕하고 싸우라는 게 아니구요, 그냥 하고 싶었던 말을 하면 되어요.’
‘근데 저는 더 이상 사람들과 부딪힐 힘이 없어요 ㅜ 그리고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힘이 생기면, 그 때 한번 해봐요. 이제 한달 남았는데 뭐 어때요? 절호의 기회에요.’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약국에 출근했다. 사람들에게 나이스하게 대하는 것이 나의 기본값이다. 그날도 웃으며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다만 좀 더 주의한 것은 내가 힘이 닿는데 까지만 친절을 베풀었다. 가슴이 답답한 느낌은 잔잔하게 유지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사람들의 농담에 웃지 않았다. 예전에는 웃기지 않아도 웃었는데, 웃고 싶을 때만 웃으랬으니 숙제를 이행하는 마음으로 웃지 않았다. 웃기지만, 이것만으로도 내가 나의 반응을 알아주는 것 같아 좋았다.
안타깝게도 퇴사예정이 알려진 후엔 실장님이나 다른 약사님들이 나에게 더 이상 말도 안되는 이유로 뭐라 하는 일이 사라졌다. 나도 비교적 새로온 약사님들과만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그 외의 약사님들과는 업무적인 이야기들 제외하고는 굳이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소리 해보려해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금지령, 웃음 금지령… 정말 재밌다. 이런 솔루션은 나처럼 시선의식 많이 하고 최대한 말 잘 들으려 하는 친구들에게만 내려지는 금지령일 것이다.
좋은 금지령인 것같다.
아무것도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는 것 같았던 그 무기력한 상태에서 조금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