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선물이에요.

여덜번째 상담

by 썸머트리

감정카드를 해보기로 했다.


카드가 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이렇게나 많은 감정들이 존재한다는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요즘 느끼는 모든 감정을 골라봐요.‘


약 20장의 카드를 골랐다. 여전히 내 정서가 부정적임을 눈 앞에서 보니.. 나름의 노력에도 바뀌지 않은 것 같아 실망스러웠다.


‘여기서 강하게 느끼는 감정을 한번 더 골라내 볼래요?’


-조바심나는,속 타는, 초조한

-답답한,갑갑한

-막막한,암담한

-혼란스러운

-후회스러운,아쉬운,안타까운

-귀찮은, 성가신


이 여섯가지 카드가 최종카드였다.


‘설명해주세요 썸머씨.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해보고싶은 것을 택하는 것보다 대중적이고 안전해보이는 것을 택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라 퇴사 이후의 삶이 삶이 너무 혼란스럽고 막막하다.

동시에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될지 빨리 알고싶은 마음이 앞서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답답한 감정이 든다.

후회스럽고 아쉬운 것은 그 동안의 내 모든 선택들이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여러 이유로 방어기제가 올라가 관계가 좌절되었던 것,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도망나오지 않았던 것, 말해야할 때 말하지 않고 말하지 말아야할 때 말했던 것, 다른 환경에서의 나의 가능성을 시험해보지 않았던 것. 그래서 점점 스스로가 싫어졌던 것..

교회에서 리더로 섬기고 있는 것 또한 요즈음 쉽지 않다고 느낀다. 나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그 말을 잘못 해석해서인지, 혼란스러운 감정을 꾹꾹 누르고 이상적인 모습을 이루기 위해 살아온 지난 시간이 헛되보인다. 방향성을 잃은채 교회를 가는 것 자체가 귀찮고 성가시게만 느껴진다. 근본적인 질문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난 도대체 무얼 믿은거지? 난 누구의 말을 따르고 있는거지? 내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오해하고 있는거지?


‘선생님, 몇달이 지났는데도 별반 다를게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그냥 이런 사람인가봐요.‘


‘썸머씨, 이 감정들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감정들은 지극히 정상적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 가운데 살아가요. 특히 썸머씨 나이대에는.그리고 말했죠. 모든 감정은 선물이라는.‘


여러번의 상담을 받으며 수차례 들어왔던, 감정은 선물이라는 것. 이번 상담에서도 역시나 이해하지 못한채 집으로 돌아갔다.


사회모임에 나가보라는 선생님의 제안에 이것저것 찾아보는 보았다. 인스타피드를 슬슬 넘기다보니 한달동안 영화와 책을 번갈아 가며 보고 나누는 모임이 있었다.


첫번째 영화제목은 <이터널선샤인>. 옛애인의 기억을 우발적으로 지우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려낸 영화이다.

여전히 감정이 남아있는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어떨지 궁금해서, 나와 달리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궁금해서 3일정도 망설이다가 간단히 자기소개서를 써서 냈다.

며칠 후 함께 할 수 있다는 문자를 보고, 웨이브에서 급하게 결제하여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에 짬짬히 다시 보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에는 영화의 푸르스름한 색채 때문에 마냥 우울하게만 느껴졌던 장면들이 하나하나 이해가 되고 이입이 되면서 이 불완전한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스럽게 여기는 내가 놀라웠다. 그래서 아팠지만, 깊은 감정을 느꼈던 작년의 내가 고마웠다.


수요일, 퇴근을 하고 샐러드바에서 저녁을 해결한 후 서울대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7명의 사람들이 도착해있었다.

다들 여러 마음으로 왔겠지. 이미 감정이 닳을대로 닳아버린 나는 ‘위험회피 줄이기’라는 목표만 애써 생각하며 자리에 착석했다. 상냥함과 예쁜 미소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호스트는 우리를 위해 여러 질문을 준비해왔었다.

그 중의 하나의 질문이 나에게 새로운 시선을 선사해주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과거를 알고도 재결합을 결심합니다. 이후 그들의 만남은 어땠을까요?]


질문을 보고 문득 상담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감정은 선물이에요.’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웠으나 자석처럼 다시 끌린다. 그리고 서로의 대한 기억이 담긴 테이프를 받게 된다. 본인의 목소리로 왜 헤어졌는지의 이유가 여실히 담겨져있는.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작별을 고하려 하지만, 조엘은 테이프처럼 될 일은 없다며 한번 더 관계를 지켜나가 보자고 클레멘타인을 설득하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연인이 되었다.


이들의 재결합을 긍정적으로 본 사람들은 테이프라는 오답노트가 있으니 새로운 사랑을 좀 더 결속력 있게, 후회되지 않도록 소중히 다루어나갈 것이라 했다.


요즘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긴했지만, 과연 그럴까 ?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냐하면 테이프는 우리에게 감정을 선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테이프는 헤어짐의 이유를 담고 있지만, 그 사건들 속에서의 감정을 오롯이 느끼게 해주지는 못한다. 현실에서 겪어야만했던 과정들에 아픈 감정들과 좋았던 감정들이 덧붙여져 새로운 기억으로 우리에게 정착될텐데, 사실만을 담은 테이프가 새로운 기억만큼 강력하게 이들에게 작용할 수 있을까? 정말 ‘테이프로부터 배웠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아, 감정은 정말 선물이 맞구나 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사실에 연결되어 있는 감정의 잔상이 강렬한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아팠으니까 그리고 상대방도 아플 것을 아니까.


어쩌면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테이프가 없이 그냥 재회를 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더 잘 사랑할 수도 있었겠다.


그렇다면 여지껏 배워온 것처럼 나에게 오는 감정들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슬프구나, 우울하구나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일테다.

왜냐면 사실 그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에 힘을 빼는 것은 여전히 어려우나 모든 감정을 환영하는 그 시기가 언젠가는 찾아온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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