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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육도씨 Mar 08. 2020

맥심 원두 드립백 싱글 오리진(에티오피아 시다모)

2020.03.08

차에 다도(茶道)가 존재한다면 커피에서의 다도는 핸드 드립인 것 같다.
나라마다 다도가 다르지만 결국 차를 우리고 마시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수련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사실 나는 그냥 맛있게 우리고 즐겁게 마시면 그만이지만) 어쨌든 나는 집에서 핸드드립을 하면서 괜히 경건해지곤 한다.
 주전자 한 바퀴 돌리고 뜸 들이면서 경건.. 또 한 바퀴 돌리고 경건.. 커피란 무엇인가. 문제는 물 조절이 안된다는 것. 항상 정량보다 훨씬 많이 물을 부어서 원래 제대로 우려냈으면 어떤 맛이 났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드립백을 처음 알았을 때는 신세계를 만난 듯했다.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옳거니!
이거라면 물 조절할 수 있겠지.
(그렇게 우러나온 진한 커피는 카페인 과다의 원인이 되었다.)

핸드드립의 재미는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면서 로또 번호 맞추듯 원두 설명에 있었던 맛을 찾아내는 것이다.
정말 다크 초콜릿 맛이 나는지, 스파이스의 향이 나는지 등등. 절대미각은 아니지만 대충이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맛을 찾으면 신이 난다. 예전에 친구와 갔던 카페에서 딸기와 사탕 맛이 난다는 핸드드립 커피에서 딸기 사탕 맛이 나서 정말 재밌었다.
이번에 마신 커피는 에티오피아 시다모. 패키지에 쓰인 대로 홍차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꽃 내음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맥심에서 어느새 원두 드립백 커피가 나왔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 기억엔 맥심은 노란 봉지랑 연아 느님이 광고 모델인 화이트 모카랑 카누. 이렇게 인스턴트 믹스 커피만 존재했는데 말이다. 믹스커피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참 간단하고도 맛있다.
 하지만 믹스 커피가 개발된 데엔  IMF가 터진 이후 실무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커피를 타야 했던’ 여성 직원’들이 해고가 되어 남성 직원들이 커피를 타게 되면서 한 번에 탈 수 있는 커피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내용을 한 tv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남자들이 불편을 겪고 나서야 간편한 것이 개발된다는 것도 속상한 일이지만 애초에 여성들이 잡무를 보는 것이 실무교육이 되고, 경제가 나빠져서 여성 직원들이 해고되었다는 것도 속상한 일이다.
 요즘은 회사 안에 카페나 커피 머신이 구비되어있는 곳들도 많아졌고,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자신의 커피는 자기가 타 먹자는 인식도 늘어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회사에서 남을 위해 커피를 직접 타본 적은 없다. 대신 회의 시간에 홀로 커피 심부름을 갔다 온 적이 있다. 물론 회사 막내 기는 해도 분명 같은 날 입사한 남자 동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팀장님은 나에게만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정말 단순하게 내가 막내라서 나한테 시킨 걸까? 아니면 내가 막내인 데다 여자라서 시킨 걸까?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자 라며 넘어갔지만,
 커피를 타던 업무 외의 잡일에서 커피를 가져오는 심부름으로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남(자)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같은 회사를 다니며 다들 회의를 하며 중요한 얘기가 오갈 때 혼자 커피를 사들고 오는 잡무로 중요한 내용을 놓친다거나 발언의 기회가 줄어드는 것 등을 포함한 소외감은 이로 말할 수 없다. 2020년이다. 설마 아직도 구시대적 발상으로 잡무는 여자가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길 바란다.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본인이 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일은 여성들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남성들이 하면 전문직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마침 오늘은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다.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유리 천장 없이 원하는 만큼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여자들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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