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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육도씨 Jun 30. 2020

영화 감상문 <리틀 포레스트>

감자 빵

리틀 포레스트

무기력증은 불시에 찾아온다. 계획했던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 과습으로 뿌리가 상해 물을  이상 빨아들이지 못해 고사 직전의 식물이  기분이 들고, 머릿속은 젖은 솜으로 꾹꾹 채워진 듯했다. 
어떤 사람은 운동을 하면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성취감을 얻는다고 했다. 그런 것처럼 나에게 그나마 잠깐 힘을 나게 해주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요리였다. 그렇다고 잘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어찌어찌 만들기는 했는데 맛은 그럭저럭. 나머지는 태우거나 간이 잘못되거나 등으로 실패. 정말 맛있는 건 어쩌다 가끔이다. 그래도 요리를 만드는 순간엔 아무 생각이 안 든다.  만들고  다음은 결과가 어때도 약간의 성취감을 얻는다.
물론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으면  힘이 난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거나 먹기 위해 산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후자인 듯하다.
맛있는 걸 먹지 못한다면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한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미래에 음식 대신 알약 하나로 충분히 허기와 영양을 채우고 살아갈  있게 된다면.
하지만  생각엔 식량난이 오지 않는 이상 그것이 보편화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그런 알약이 보편화된 사회가 온다면?  뒤엔 누군가는 다시 알약이 보편화되기 전으로 돌아가려고 할지도 모른다.. 라따뚜이처럼 우연히 채소 하나를 맛본  재료 본연의 맛과 향기 그리고 식감. 그것들이 섞였을 때의 조화를 알게 되고 또다시 요리를 하게 될 것이다.

요리를 주제로 다룬 영화는 셰프들 간의 대결이나 수상한 음식점이 아니라면 대부분 힐링 영화다. 그만큼 요리와 음식에는 사람을 치유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요리를  때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3분이면 뚝딱인 음식이 있는가 하면 반나절, 하루 길게는 몇 달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그런 과정을 함축해서 관객들에게 시각과 청각의 만족감을 준다. 요리를 하는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안심, 평화로움이 남는다.

안되는걸 억지로   없어 일단 모든 걸 뒤로 하고 리틀 포레스트를 보기로 했다.

농촌에서 살다 상경해 도시 생활을 하던 주인공은 고향집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주인공의 엄마는 주인공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자취를 감춰 버렸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집에서 자라는 농작물로 자급자족하며 지내는 내용이다.

힐링을 위해 시골에 내려가 귀농하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음을 접고 그저 영화를 즐겨야겠다며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일본판을 보면 평화로운 순간이 지나가고 밤이 되자 손바닥만 한 나방이 날아다닌다거나, 오리 고기 요리하기  오리를 손질하는 장면이라던가. 불편한 장면일  있지만 어찌 보면 현실적이다. 생물을 도축하는 과정은 부위별로 깔끔하게 손질되어 마트에 진열된 고기에 비해 익숙하지 않다. 도시에 살면서 편한 것만 접하기 때문에 그런 불편한 부분은 인식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한국판에서는 고기반찬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에 맞는 메뉴로 바뀌기도 했지만, 한국판의 감독인 임순례 감독님이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채식 위주의 식단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채식 식단이라고 하면 샐러드밖에 생각이 안 나고, 풀만 먹고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두부, 나물이나 장아찌, 무침, 쌈,  등등 리나라엔 생각보다 채식 위주의 먹거리가 많다는  상기시켜줬다. 예전엔 농경 중심의 사회였으니 고기반찬보다는 채소 반찬이  많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역시 농촌의 애로사항은 등장한다. 농번기라 일손이 부족해 슈퍼가 문을 닫았다던지, 태풍으로 농산물 피해를 입었다던지. 일본판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지만 여전히 귀농생활이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농사는 엄청난 육체노동의 연속인데 남이 하기 때문에 힐링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역시 영화는 영화로 즐겨야지 귀농생활은 나와는 맞지 않다. 한때는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에 머물며 농사하는 것도 도와드리고 개인 작업을 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도시의 인프라의 편리함에 찌들어있는 데다, 베란다에서 키우는 식물조차 여럿 죽어나가는 걸 보면 역시 귀농은 언감생심이다.

 다른 내용은 감자 빵 레시피다.
일본판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엄마는 서로 다른 식감의 감자 빵을 만들어냈는데, 주인공의 엄마는 끝까지 본인의 레시피를 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하지만 한국판에서는 주인공의 엄마가 편지로 감자 빵 레시피를 보내온다.
 부분에서 가장 일본과 한국의 감성의 차이를 느꼈다. 그저 서로 다른 양육 방식일 테지만 전자는 딸이 엄마와 각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개개인의 삶을 살아가는 반면, 후자는 보이지는 않아도 어딘가 이어져있는 엄마의 . 엄마가 딛었던 길을 따라 걷는 느낌이었다.

일본판과 한국판   봤지만, 같은 원작을 두고 비슷한  다르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식단이나 등장인물 간의 태도 같은 것에서 일본판은 일본 감성이 녹아있고, 한국판은 한국 고유의 감성이 녹아있다.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런지 한국판에  공감이 간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조금이라도 심리적으로 해결이 될까 했는데,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았다. 서른이 되어가는 동안에도 여태까지 나는 무얼 한 건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가 걸어온 길은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황무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척해서 밭도 갈고 농작물도 심고 하면 좋으련만 ‘뭐라도 그냥 해봐’의 그냥이 쉽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도 누군가 시켜주지 않는 이상   있는 게 아닐 때도 있다. 내가   있는 것이라곤 나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뿐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성취감이 필요했다. 마침 집에  감자가  상자가 있었다. 이번엔 원작 만화의 레시피를 참고해서 나도 나만의 감자 빵을 만들기로 했다. 감자가 많이 필요할  알고 많이 삶았는데 원래대로 넣으려면 감자 하나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남은 감자는 어쩔  없이 감자조림행.  제빵은 독학이 전부라 예전에는 빵을 만들다 여러  실패했었지만 이번엔 시도한    만에 조금    같다. 처음엔 감자를 제대로 으깨지 않아 감자 알갱이가 남았고,  번째는 너무 욕심을 부려 감자를 많이 넣었더니 겉모습은 빵인데 식감은 떡이 되었다.  번째는 레시피보다 감자를 하나  넣기는 했지만 으깨진 감자가  덩이로  뭉쳐질 때까지  으깨 반죽에 넣었더니 여태까지 만들어본  중에 제일 말랑하고  같은 빵이 되었다. 그냥 먹어도 맛있고 반을 갈라 이것저것 넣어 햄버거처럼 먹어도 맛있다. 일단은 이걸로 만족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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