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넘은 포용
예수는 77번이라도 용서해야 된다고 했죠.(마태 18:21, 22) 또한 사랑은 모든 잘못을 덮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잠 10:12)
반면에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마태 12:31, 히 6:6, 10:26, 2, 요한 1서 5:16)
인간은 무지나 인식부족, 순간적인 충동이나 욕망으로 죄를 지을 수 있죠. 그러나 나중에 진정으로 후회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용서를 받고 도움을 받게 될 수 있죠. 육체의 약함으로 인한 범죄입니다.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범죄인 경우 그것은 수년 혹은 수십 년 면밀히 계획된 것일 수 있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대거 관여하죠. 결국은 피해를 당한 사람들로 인해 사형을 받게 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애국적 행위였다고 변명하는 것이죠. 회개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치인들 가운데도 범죄자들이 많이 있죠. 피해자들에게 고발과 고소를 당한 경우에도 무죄하다는 주장을 하기에 급급하죠. 계획적으로 저질러진 범행인 것이죠.
예수도 하느님이나 예수자신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가 안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범죄적인 계획성과 고의성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이처럼 명백하게 정죄되고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죄들이 있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실 무분별하게, 그리고 그가 마치 큰 아량이나 덕을 지닌 것처럼 과시하면서 무조건적으로 관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주장이 맞다면 그 관용치 않음에 대해서도 관용해야 하여 그런 주장은 자기 파괴에 뻐지게 되죠.
뉴에이지류의 사상 가운데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악이 더 커지고 강해지기 때문에 그냥 못 본 체 하고 우주의 어떤 섭리의 손길이 그것을 처리해 줄 때까지 가만히 놔두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저 조용히 명상이나 하고 있으라는 것이죠.
그런데 악에 저항하는 그런 태도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 즉 악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러한 태도에 대해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말고 가만히 두어야죠. 역시 자기모순인 것이죠.
어떻게 보면 죄에 대해서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면에 있어 스스로에게 같은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 있으며 방임적이거나 방종적인 사람일 수 있죠.
사랑은 공의와 균형을 이루는 상보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특정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에 대한 엄한 징계나 처벌을 하는 경우도 있고 마땅히 사랑받을 만한 대상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악한 대상을 징벌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의적으로 범행을 하고 그것이 좋은 의도였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는 확신범인 경우 그의 선택에 따라 멸망시키는 것은 사랑이나 자비, 은혜나 용서의 원칙에 상충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한 악을 방치하는 것이 직무유기인 악인 것이죠.
그러므로 어떤 인간들의 도덕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이 포용하거나 관용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주제넘은 것이며 범죄적인 것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거나 주장을 하는 사람 자신이 결코 처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