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를 하고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들은 자기만족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필요한 봉사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친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성향이 자기중심적이죠. 타인에게 그처럼 세심하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그처럼 쉽게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의식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자신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겠지만 무의식적으로 자기애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에고가 강하고 에고에 빠져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사랑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사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매력적인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평가나 감정이라고 할 때 그 매력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깊고 강하게 인식하는 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러한 인식이 풍성할수록 사랑도 그만큼 더 깊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집착이나 욕심에 기인한 어떤 것과는 다릅니다.
외모가 아름답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호감 같은 것은 어떻게 보면 사랑이라 할 수 없는데 그런 것은 더 큰 성적 쾌락을 얻지 않을까 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욕구만족에 대한 기대에 기인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의 질이 높아서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다는 전제하에 그것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도 비슷할 것입니다. 자신의 성욕, 물질욕, 명예욕 등을 만족시켜 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대상에 대해 갖는 호감을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나르시소스 같은 경우 자신의 외모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도취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정의하기에 따라 자기애에 빠진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깊은 이성적 인식과 평가에 기인한 것이라야 진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자신의 면면을 제대로 평가하게 된다면 사랑은커녕 그 반대의 감정이 생기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죠. 도저히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대해 자신이 가꾸어놓은 인격적 자산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면요. 오히려 나는 왜 이럴까? 하는 비하감에 빠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신체일반 그리고 지적 정서적 영적기관 일반에 대한 것을 인식하고 경탄을 느낄 때 또한 만물의 질서와 아름다음에 대해 알아가면서 창조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때, 그에 반영되어 있는 지혜와 사랑을 인식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숭상심을 일종의 사랑이라 할 때 드디어 사랑이라는 것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다음 인간은 동료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식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마가복음 12:30,31)
그런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의식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발전에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삶의 한 목적을 행복이라고 하면 그것은 창조주와 동료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영적 성장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애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으로는 진정한 유익을 고려하면 될 뿐입니다. 에고라는 것은 선척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성장시키려고 노력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오히려 인간은 자기 부인이 필요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부인은 선언된 규정이기도 합니다. (누가 9:23)
인간은 자기애에 빠질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과 인간개개인은 불행한 것이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삶의 원리, 행복의 원리, 사랑의 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