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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Jul 07. 2024

한 번에 반하는

한 번에 반하는 


어떤 이성을 보고 첫눈에 반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소위 상사병이라는 것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그(그녀)와의 맺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 있습니다. 수년, 수십 년, 죽기 전까지 가슴에 묻어두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많은 경치들이 첫눈에 반하는 환상적인 것일 수 있고 첫 입에 반하는 환상적인 맛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코에 반하는 냄새라는 것도요. 특히 첫 귀에 반하는 음악을 체험은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은밀히 살짝, 떨면서 진땀을 흘리면서 더듬거려 보는 맨살의 부드럽고 매끈한 허벅지의 감촉이나 그런 남자의 손길을 느끼는 여인의 촉감도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예기치 않게 알몸이나 드러난 젖가슴이나 성기를 보게 되는 경우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은 꼭 감각만 그런 것이 아니죠. 어떤 감격이나 감동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가슴이 반했다고요. 글을 보거나 낭독이나 연설을 들을 때 지각도 첫 번에 강력하게 반한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머리가 반한 것이죠. 영이 감동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고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반복적으로 경험할수록 감도가 떨어지게 될 수 있죠. 또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고요. 그것은 열정이나 관심, 의욕, 애정, 감도 자체가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강한 감정이 지속되는 것은 오히려 견디지 못하는 것이 될 수도 있죠. 불합리하고 해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자라가면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감성과 지성의 기능들이 발전하게 되죠. 그러면 처음 체험한 것들이 매우 인상적이고 신비스럽고 대단하게 느껴질 수 있죠. 자기만의 것으로 느껴 주변의 지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뭔가 세상을 얻은 것 같고 다 안 것 같을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은 그에 대하여 얻을 수 있는 10,000의 체험이나 지식의 1에 해당하는 것에 불과하죠. 다른 사람들의 그 점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은 3, 17, 125, 4456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 있는데 처음의 1을 체험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죠. 그러나 그도 이제 경험과 지식을 쌓아갈수록 혹 반함이 약해진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일종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적 역량이 커져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는 것이죠. 같은 물건이라도 힘이 세질수록 가볍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무엇에 대한 첫 경험이 그 강한 짜릿함이 지속적이라면 그것만 탐하게 될 텐데 유익하지만은 않죠. 


우선 음악에 대해서 살펴보면 저 자신의 감성이 다른 사람보다 매우 더뎌서 그전에는 이 노래가 좋다고 들어보라고 추천을 받아도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귀가 열리지 않은 것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단기간 동안 수십 곡이 그렇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노래들은 지금까지 과장 없이 수천번은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특히 귀의 편차는 너무나 현저해서 추천은 못합니다. 


돌이켜 보면 그 노래들을 하루 종일 틀어놓고 환각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을 추억하는데 지금은 그런 동일한 감흥이 생기지 않죠. 그러나 그것은 상태가 나빠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음악적인 귀가 많이 발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음악의 예술적인 절대적인 가치는 그대로이죠. 저의 청력이 세져서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죠. 


그 본질을 이해하면 충격적인 깨달음을 주는 지식들이 있는데 관성이나 중력도 그러하고 상대성원리나 불확정성도 그러한데 역시 추천은 못합니다. 논리나 심리에 관한 여러 법칙들도 그렇고요. 그러나 처음의 그 감동이 그대로라면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죠. 이젠 완전히 익숙해진 것입니다. 


서두에 언급된 것으로 돌아가죠. 


서로 첫눈에 반한 남녀가 결혼을 했다고 하죠. 거의 첫 한 달을 집에 틀어 박혀 서로에 대해 마음껏 해보고 싶은 대로 성적으로 탐닉했다고 하죠. 그리고 그런 면으로 평정을 얻었다고 하죠. 


그 후에 관심이나 애정이 식어지고 다른 면으로 실망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이혼까지 고려하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제대로 된 부부생활을 하려면 경제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해도 서로 간에 사랑과 의를 교육받지 않은 상태라면 필연적으로 그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지적으로 성장하면서 더 복잡하고 난이도가 높은 지식도 소화해 가면서 느끼는 지적 행복은 더 커져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지식의 절대적인 가치는 그대로라도 점점 절대적인 가치가 높은 지식을 섭렵하게 되고 지적 행복을 느끼는 정도도 더 커진다고 할 수 있죠. 원래 인생에 설계된 원리입니다. 


부부간의 관심과 열정, 애정 그리고 서로 느끼는 성적 쾌감의 정도도 그러합니다. 계속 수준을 높여가면서 창의적으로 개발해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식어가고 감도가 줄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법칙에 거스르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일찍부터 의와 사랑을 배우지 않아 그렇게 되는 것이죠. 지각훈련을 받지 않으면 지력이 발전하지 않아 난독증이 되어 지적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지속적으로 모든 면으로 더 강하게 반하면서 삶을 즐기게 되어 있습니다. 의와 사랑을 배운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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