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정성 때문에
만물은 인간이 쉽게 알 수 있게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다. 알려면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전자나 퀴크, 광자 등은 고성능 현미경으로도 보지 못하는 것이죠. 그것들이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끈은 보기가 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끈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죠.
아무리 성능이 좋은 망원경으로도 우리 우주를 다 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은하계뿐 아니라 태양계마저도 그러합니다.
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근본 성질이 불확정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 위치도 정해져 있지 않은데 알기가 더욱 불가능하죠.
물질계도 그러한데 정신물질상관의 관계에 따라 그리고 정신은 보지 못한다는 면에 있어서 더 그러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면 인간의 정신현상은 더욱 알 수가 없죠. 정해져 있지 않은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자유의지나 존엄성은 그 불확정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정해져 있다면 자유가 없는 것이죠. 의식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방안의 자신의 침대를 자신이 옮기지 않으면 아무도 그 무엇도 옮기지 않는다면 침대의 위치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위치가 정해져 있는 것이죠. 침대에는 물론 의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전자의 위치는 이론적으로는 우주의 어디에 위치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어디에 위치할 확률도 수학적으로 0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어를 배워가면서 어느 순간에 자의식이라는 것이 생기죠. 그 생기는 순간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제삼자가 그 순간을 포착하기도 불가능하죠. '자의식'이라는 어휘를 처음 듣고 그 의미를 알고 나서도 그 후 얼마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 나에게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구나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 순간을 일기장에 기록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확정이기 때문에 어떤 생각도 떠오를 수 있으며 창의력도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도 결코 그런 생각은 떠오를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특정 전자가 여기에 있을 확률은 0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영역, 범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도록 예정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어떤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예정되어있지도 않죠. 불확정성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던 그것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지 표현 본능에 의해 언어로 옮겼다 해도 그 자체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그 자체만으로는 공도 되지 않죠. 단 그것이 행동이나 적용, 활용을 목적으로 표현한 것이면 그것은 비난받거나 칭찬받는 것이 될 수 있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통치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떠오르는 생각들과 그에 따른 감정을 통제하고 다스려야 하는 것이죠. 그 통치가 얼마나 훌륭한가 하는 것은 그 언행의 질에 달려있습니다.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것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런데 그 통제를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서가 아니라 법, 법칙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며 그것은 엄하게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완전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엄하게 그러한 것처럼 법칙은 엄하게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어서 인간은 그것에 대해 조금도 자유롭거나 융통성이 없습니다. 절대 순종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표준에 따라 자신을 통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부도 법을 만들었으면 그 법을 엄하게 적용하여 그 법을 만든 유익을 누리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인간나라도 법치국가라고 하는 것이고 그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되어있죠. 국가에서 법을 만들고 적용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통 최상위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구호로는,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주장하죠.
그렇다면 영원 불변한 창조의 법, 자연의 법칙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그러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그 장조의 법, 절대적인 도덕표준을 알아야 하죠. 인간들이 그것을 모르므로 스스로의 통치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위임에 버리고 외부의 통제를 자청해서 받기도 하는 것이죠. 죽을 위험성이 있더라도 나가서 싸우라고 하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불행뿐 아니라 생사의 관건은 이러한 지식의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없으면 외부의 통제를 받으며 노예처럼 살다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소멸이 되는 것이죠.
인간정부나 통치자도 그 법이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극단적으로는 사회로부터의 영원한 격리를 의미하는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죠.
정부들 서로들 간에도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고 싸우려 하는 경우 "한 놈도 빼놓지 않고 다 죽이라"는 호령소리가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적 일만을 죽이려면 아군 8,000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는데 자신에게 순종한 사람도 같은 처지에 이르는 것을 무릅쓰는 것이죠.
인간도 나름의 표준에 불복하는 상대를 멸망케 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스스로의 통치권을 자신에게 이양한 사람들의 목숨도 마찬가지로 멸망에 이르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지하므로 그런 식의 결말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멸망되지 않더라도 아무튼 멸망을 피할 수 없죠. 이 점은 통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확정성에 따라 인간은 절대적인 자유의지 즉 자신에 대한 온전한 통치권을 천부적으로 타고납니다. 불확정성으로 만물을 운영하는 창조주도 조금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절대적이죠.
역사는 무지한 인간들이 이양한 자신들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은 통치자, 정부, 국가들이 자기 마음대로 한 기록입니다. 재앙과 비극의 연속이죠. 자연적인 재앙보다 인간이 서로 괴롭히고 죽인 숫자가 훨씬 많죠. 중국에만도 참수된 사람이 2억 정도로 추산되다고 하는 정도이죠.
불확정성에 따라 어떻게든 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 마음대로를 악하게 해롭게 행사해 왔죠. 언어로는 숱한 거짓을 구사해 왔고 행동으로는 동료인간을 해치는 숱한 악행을 행해 온 것입니다.
창조의 법, 사랑의 법에 대한 무지 때문이죠. 이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법을 알고 그에 순응하여 빛가운데 사는 사람들도 있죠. 살게 되는 사람들이죠.
머리로는 진리를 배우고 가슴에는 사랑을 함양하고 몸으로는 창조주 보기에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