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겐가 10만 원을 주려면 그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부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과는 원인의 부분집합이라는 것이죠.
신은 우선은 단지 ‘존재의 원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단은 그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죠. 그리고 창조는 “원인에서 결과가 산출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념이기 때문에 반박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적 규정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1 다음의 수를 2라고 하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1은 2라는 것은 약속이기 때문에 증명의 성질을 지닌 것이 조금도 아닙니다. 규정적 진리라고 하는 것으로 그것을 사용하여 다른 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언어나 수, 기호 등은 그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닙니다.
신 혹은 창조주나 창조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언어적 혹은 개념적, 규정적 진리에 해당합니다.
거기서 뭔가 발전하려면, 즉 다른 개념을 덧붙이려면 추리가 필요하죠. 추리란 물론 법칙을 근거로 혹은 법칙을 사용해서 해야 합니다.
비약하면 창조의 결과인 인간이 인격체이므로 창조의 원인인 신은 인격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의외성이 있는 말이나 표정, 행동을 보면 웃음이 나죠. 또한 인간에게는 유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주는 더 하죠. 의외성이 사람을 웃게 만든 것이나 유머성이 있게 만들었으므로 그분이 우주에서 가장 유머성이 뛰어난 것입니다.
인간에게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있습니까? 역시 그것은 무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창조주도 강하게 그리워하실 수 있는 분이죠.
욥기 14:14,15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은 부르시겠고 저는 대답할 것이며, 당신은 손수 지으신 것을 그리워하실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죽어도 하느님이 부활시켜 줄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자신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죠. 물론 욥의 의식 수준은 지금 사람들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인간에게 기쁨이라는 것이 있으면 물론 그분은 더 그러합니다. (잠언 27:11, 말라기 3:4)
부정적인 감정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후회도, 슬픔도, 분노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죠. 질투도요. 인간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못 견뎌하시죠.
물론 창조주이시므로 초월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점은 인간과 다르겠지만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는 인격체이고 다양한 감정들을 풍부히 느끼시는 분입니다. 이는 간단한 추리로 확증이 되죠.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이고 부분의 법칙에 따라 창조주에게 있는 것들입니다. 그중 일부를 선물로 받는 것이죠.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은 그 이상이 창조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인간이 행복하려면 행복하신 하느님(디모데 전서 1:11)을 본받으면 됩니다.
사실 인간은 심지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큰 그리움에 젖어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의 실현을 창조주께 요청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