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
인간에게 있어 의식에 관한 지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세상의 배후 통치자는 이를 이용하여 인간들을 노예상태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열과 대립구도를 당연하게 만들어 그에 속박되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많이 접하는 것에 익숙해지며 애착을 갖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지역, 문화, 음식, 전통, 언어, 종교 등등이죠. 고향이나 조국 그리고 가족, 친족, 지인들을 사랑하거나 그리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질감을 느끼거나 배척하게 될 수 있습니다. 편견을 갖게 되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죠.
사실은 그 반대여야 하는 것이죠. 자신이 익숙해져 애착을 갖게 된 것도 사실 본래적이 아닌 것일 수 있습니다. 태도를 전향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렇게 된 것들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것, 이질적인 것에 대해 반가워하며 애정을 나타낼 대상으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익숙해진 것을 오히려 배척하고 심지어 미워해야 할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원칙입니다. 원칙적이 아닌 많은 것에 익숙해져 애착을 갖게 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을 거슬러 어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욕을 하거나 때린다면 불쾌하거나 화가 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정당한 것이면 그렇게 자극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일깨워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대가 부당하게 그렇게 한 것이라면 드디어 나에게도 용서라는 것을 할 기회가 생겼구나 하면서 내심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할 동료인간이 한 행동이 아닙니까?
그렇듯이 인간이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접하여 익숙해진 것들에 대해여 애착을 나타내고 그렇지 않을 것들에 대래 경계하거나 불신하거나 배타적이 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동료인간이 그런 방식으로 익숙해져 애착을 갖게 된 것에 대해 건전한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알아보려 한다든지 존중해 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본래적이고 원칙적인 것에 대해 그렇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접하여 익숙해진 것이 그렇지 않을 확률이 99.9%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서로 잘못된 것들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한 단편에서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적이 자기 집안사람들일 것입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큰 애정을 가진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아들이나 딸에게 더 큰 애정을 가진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의 고통의 기둥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내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자기 영혼을 찾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영혼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찾을 것입니다. (마태 10:36~39)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형주를 지고 계속 나를 따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구할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파멸에 이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누가 9:23~25)
이미 익숙해져 애착을 갖게 된 것을 부인하는 데는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삶과 생명에 대해서요.
익숙해진 것들에는 지금까지 언급한, ‘대상’에 대한 것들이 있고 또 자신의 내면에 관한 것들이 있습니다. 감정, 습관, 가치관, 태도 등등이죠.
그 어느 것도 부인하고 배척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큰 고통이 따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날마다 형주를 지는 것에 비유하는 것이죠.
그런데 일시적으로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신이 곧 죽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의 자기 본위적인 애착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런 결과를 가져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