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의 분량
인간은 시공에 묶여 있지만 그게 불편이나 고통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엉뚱한 것이죠. 보이는 사물은 모양이나 크기나 색을 지니고 있죠. 왜 그래야 하는지 불평하는 사람은 없죠. “왜 빛이 있어야, 눈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거야?” 하고 투덜거리는 것은 정상이 아니죠. 뭔가가 있다면 그 위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제한으로 느껴집니까? 그런 비정상적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몇 가지 범주들을 언급한 것인데 그러한 것들은 만물을 이루고 있는 기본 조건, 존재의 조건이어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신체를 가진 인간은 반드시 키나 몸무게라는 것이 있죠. 지극히 당연하죠. 속성입니다. 분리 불가능합니다. 키 없는 몸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죠.
그러나 간혹 왜 그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하고 원망이나 비현실적인 희망사항을 피력하는 경우가 있죠. “왜 이렇게 세월이 빨리 흘러 죽기 직전에 이른 것이야?” 하기도 하죠. 다년간 교도소에 감금된 사람이라면 마음대로 공간이동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답답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병이 빨리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곧 영안실로 가게 되는 것이 확실한 사람은 시공에 대해 만감이 교차할 수 있습니다.
만물의 기본 조건에 대해 원망하거나 답답해하는 사람들은 실은 그 조건을 거스려서 그렇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을 수 있던 시대에 그 영상이 남아 있다면 과거는 아니지만 과거의 그 시절 그 장소를 생생하게 볼 수는 있죠. 녹음기가 있던 시절에 그 녹음테이프가 남아있다면 그때의 목소리는 들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6천 년 전쯤의 세계를 찍은 영상이 있다면 어떤 중요한 사건들의 진실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의 사람들이 과연 천년 가까이 살았는지 과연 거인들이 있었는지 그 세상이 대홍수로 멸망되었는지 인류 전체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였는지 등등요.
물론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지혜를 지닌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가 그때의 기록을 보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죠. 몇몇 과학이론들도 그러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음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발견한 어떤 과학적 지식보다 더 확실한 것은 서두에 언급된 것들입니다. 법주나 사유의 법칙에 관한 지식들이죠. 진정한 과학은 그 기초 위에 설립되어 있죠.
과거의 인간들이 근래에 밝혀진 과학적 지식 없이 미신적 주술적 방법으로 질병과 같은 고통을 초래하는 현상에 대응하려 한 나마지 심지어 황제들도 그렇게 단명했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날은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얼마나 다행이고 축복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 속에 함정이 있습니다.
기본적인 조건을 고의로 무시한다는 것이죠. 범주에 대해 무지하고 사유의 법칙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기본적인 조건들을 무시하는 심각하고 치명적인 무지몽매함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만물이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본 지식이라고 하면서 개념이 범주로 이루어졌다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주변에 물어보십시오 범주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논리학 개론에 인쇄된 글귀를 아무리 보아도 이해를 못 하는 것입니다. 사유의 법칙도요. 수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이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힘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시험 보기 위해 관련 공식이나 그 법칙의 이름을 외우고 있기는 하지만요. 전자는 오성적 지식이고 후자는 이성적 지식인데 이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물이 맹목적 우연으로 생겼다는 진화론 같은 것을 주입시키려 하니 인간의 의식을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걸 과학적 주장이라고 설득해야 하니 범주나 사유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의식상태로 마비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 성공하고 있죠. 그래야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세금도 걷고 무기와 군대도 만들고 전쟁도 할 수 있게 되니까요.
과학이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본질상 속임수이고 허상인 것이죠. 철학이나 종교와 같이요. 궁극의 것을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 있죠. 시공의 시작에 대해서도, 미시나 거시세계의 본질에 대해서도 소설 같은 얘기를 서로 다투어하는 정도이죠. 천당이나 지옥, 전생이나 윤회의 얘기처럼요.
선전처럼 인간의 수명을 크게 향상한 것도 아닙니다. 모세 시대의 수명하고 비슷하니까요. 사람들에게 실제 물어보면 자동차나 컴퓨터 같은 것 때문에 고대인들보다 크게 행복해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의외적이게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사람이 많은 것이죠. 저개발 국가가 오히려 행복지수가 훨씬 높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전자 하나도 마치 의식이 있는 것처럼 지능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죠. 어떤 목적에 부응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무의미하게 맹목적으로 우연히 생겼다는 주장을 믿게 하려면 모든 존재나 행동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다는 법칙을 무시하도록 의식을 그렇게 세뇌시켜 놓아야 하죠. 범주를 이해하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인간들이 기본조건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 당연하죠. 혼란과 혼동에 빠지게 되고 엉뚱한 푸념이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가 기다리는 삶을 살 뿐인 것입니다.
시공의 분량에 순응하면서 산다는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살면서 기다리면 반드시 그때가 옵니다. 실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죠. 시공이나 분량, 범주나 사유법칙은 전혀 속박이 아닙니다. 창조주와 창조의 법칙도요. 알아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