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과 사랑
시간이나 공간이나 사랑은 아마도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앞서 있었던 사랑과 미움을 알지 못한다.(전도 9:1ㄴ)
누구는 시공을 범주라 하고 누구는 사고의 조건인 표상이라고 하는데 그 무엇이든 인간의 의식에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배경으로, 바탕으로,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며 그 자체는 앎의 대상이 아닐 수 있습니다.
현재 인간은 공간이동을 하지도 못하고 과거나 미래로 갈 수도 없습니다. 꼼짝없이 지배되어 있죠. 시간을 늦추거나 빠르게 하거나 정지시킬 수 없죠.
사랑은 전혀 성격이 다른 것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시공이 범주라면 정의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랑은 법주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쉽게 정의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시공에 절대적으로 속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활용하기는 합니다. 공간을 자유롭게 활보하기를 원하고 어떤 시간에 무엇을 하는 지를 온전히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원하죠. 저도 제가 원하는 공간과 시간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며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글을 올리고 있는데 어떤 한계 내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죠. 그러나 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인간들로 인한 제약이 가장 크고 본질적입니다. 공간이동이 지구 차원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가는 것이 허용되는 지역도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되기도 하죠.
군대나 직장 같은 조직에 매여 있는 사람은 특히 시간에 있어 더욱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도 개인의 선택에 의해 저같이 상대적으로 상당히 자유롭게 활용하는 사람도 있죠.
사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시공을 통해 축복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야 축복이고 평화롭고 자유로워야 축복이고 젊고 건강해야 축복인 것이죠.
시공이 실제로 궁극적으로는 저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축복에서 소외된 시공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경과가 상황의 악화와 생명의 중단을 가져오죠.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사랑입니다. 시공을 통해 날로 그 축복이 더해지기만 하는 인간은 사랑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활용할 수는 있어야 하는데요. 사랑을 먹지 못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죠. 물론 알지도 못합니다.
인간들은 시공의 축복에서 뿐 아니라 사랑에서 소외되어 살고 있죠. 사랑의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죠.
인용된 구절에서 알려 주듯이 인간은 미움도 뭔지 모릅니다. 그러나 활용은 최대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공이 저주가 되게 하고 있죠.
인간들은 거의 예외 없이 미움에 지배되어 활용되고 있습니다. 욕을 하고 투덜거리고 악이 넘치는 게임을 하거나 소설을 읽거나 드라마나 영화를 보죠. 현실 가운데서도 공식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미사일을 쏴 대고 있죠.
사랑은 먹지 못하고 미움만 먹고 있죠. 생각도 미움의 세계에 머물러 그것을 즐기고 있으며 미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공에서 배척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시공에 앞섭니다. 그보다 우선적인 것이죠. 시공은 사랑으로 운영되며 사랑인 사람이 시공의 축복을 받는다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심지어 전자도 의식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움직인다고 하죠. 물론 인간은 전자의 본질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자, 전자파의 혜택은 엄청나게 받고 있죠. 그 역시 축복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저주도로 작용합니다. 미움에 대해서 미움의 인간에 대해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죠.
인간은 알 수는 없어도 그에 순응하여 축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식탁이 있는 곳으로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야 그것을 먹는 것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