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왜
인간에게는 양면성이 있어 보입니다. 하찮음과 존귀성이죠. 실제 인간들도 천한 자와 존귀한 자가 있어서 현실적으로 그런 대우를 받습니다. 황제가 있고 노예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황제나 노예나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이 두 가지 측면이란 모두 인간의 임의적인 인식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돈이 없으면 천하게, 있으면 귀하게 대접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인간에게요.
인간에게 인간의 그러한 자의적인 인식과 관련 없이 절대적인 존엄성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에 따른 대우를 받으며 살 때가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대우란 누구에게 받는 것입니까?
사실 사람에게 받는 평가나 대우는 본질적이지 않습니다만 실제 인간들은 큰 영향을 받죠. 인간이란 본시 사회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인간이 자신의 조건이나 상태에 대해 원망하는 시각으로 보고 느끼는 것은 현실입니다. “어머니 왜 날 나으셨나요?”하는 것이죠. 성서의 기록은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죠.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질그릇 조각들 가운데 한 조각에 불과하면서,
자기를 만든 이와 다투는 자에게 화가 있다!
진흙이 도공에게 “무엇을 만드는 거요?”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또 네가 만든 것이 “그에게는 손이 없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아버지에게 “나를 자식이라고 낳았습니까?” 하고,
여자에게 “나를 왜 이 모양으로 낳았습니까?” 하고 말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이사야 45:9,10)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질그릇조각”, “나를 왜 이 모양으로”라는 표현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천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그런 상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자초하여 그렇게 된 것이죠. 인간 중심원리에 따라 인간이 법을 무시하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책임이 조금도 창조주나 창조의 방식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분별없이 투덜대고 그런 시각으로 사는 사람에게 화 즉 불행이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노예 상태인 것은 맞습니다. 자신이 노예주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 심지어 황제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도 일거에 도륙될 수 있죠.
인간이 자력으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무너트리기는 하였어도 원상복구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창조주의 뜻은 아니므로 창조주는 당연히 복구마련을 하게 됩니다.
대가도 뇌물도 받지 않고 노예상태에서 풀어 주는 마련이 있는 것이죠.(이사야 45:13)
내가 땅을 만들었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 “내가 의로 한 사람을 일으켰으니,
내가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할 것이다. 그가 내 도시를 세울 것이며,
유배된 내 백성을 대가도 뇌물도 받지 않고 풀어 줄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이사야 45:12,13)
세상의 구부러진 상태는 인간의 힘으로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노예처럼 비천하게 된 인간의 상태도요.(전도 1:15)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로 하여금 왕국의 왕으로 임명하고 천년의 통치를 통해 바로 잡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그 마련에 희망을 두고 기다린 사람만 노예 상태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멸망된 후에요.
지금 상태가 열악하여 한탄하고 있다면 투덜거릴 것이 아니라 이 마련의 의존하여 본래의 존엄성을 찾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