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쁨
회중을 모으는 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고 진리의 정확한 말씀을 기록하려고 애썼다.(전도 12:10)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허튼짓을 잘 못하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니 주의를 하게 되죠. 그리고 사람들을 많이 모아놓고 하는 말도 허튼 말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할 말을 신중하게 고려하게 되죠.
진리, 진실을 알리는 말보다 기쁨을 주는 말을 앞세운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둘은 서로 상충되지 않습니다. 거짓이 진정한 기쁨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진리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축복의 소식이 있죠. 심중하게 만드는 저주성도 있을 것입니다. 전자에는 염려나 불안, 두려움을 덜어주는 것도 포함될 수 있죠.
솔로몬은 지혜롭고 유능한 카리스마 넘치는 왕이어서 실제로 그런 계획들을 가지고 있었고 실행능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이라고 하면 백성들이 큰 불만 없이 모였을 것입니다.
예수는 의도적으로 모으려고 하지 않았어도 군중들이 모여 쫓아다녔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얻었기 때문이죠. 기쁨과 새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솔로몬 이상의 권위를 풍기고 있었죠.
나를 하느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 맞아들였습니다.(갈라디아 4:14)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천사나 예수처럼 맞이하였는데 그렇게 할 만한 기쁨을 얻은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을 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곰곰하게 생각할 경우에 그것이 어렵지 않게 나오게 하려면 정신가운데 풍성하게 들어 있어야 하죠. 자신에게 실제로 없는 것을 억지로 짜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 스스로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 영적 자산을 지니고 있어야죠. 어떤 경우에도 기쁨의 기조 위에 사는 사람이야말로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진리의 정확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을지언정, 하긴 그것도 애썼다고 하고 있죠. 기쁨을 주는 말은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나오지는 않았음을 시사한 것일까요?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그 자신이 진리인 예수가 오신 이후이며 그 필수적인 내용들의 기록이 완료된 이후이죠.
기쁨의 기조 위에 살 수 있죠.
저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지만 기쁨을 주는 그런 내용은 아닙니다. 제 영적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나 그렇게 하죠.
언어가 다르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언어가 생활화된 사람들에게나 전달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또 애를 써서 기록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진지한 의도를 크게 갖지 않는 낙서 성격인 내용들이죠. 아무 때나 떠오르는 대로 적어 두는 식이죠.
그나마 읽는 분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것은 작은 의미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음성을 전달하는 성격도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기적 같은 기쁨이기는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