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죽은 것
나는 너의 행위를 알고 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 있다.(계시 3:1)
실제로 죽어 있거나 죽은 것처럼 절망적인 사람에게라면 이와 같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전혀 의미가 없죠. 강한 자극을 주기 위한 수사적인 표현인 것이죠.
인간의 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와 가룟 유다의 경우죠.
베드로는 죽어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막상 상황에 직면해서는 두려움에서 즉 육체의 약함에 굴복하여 부인하는 행동을 했죠.
그러나 가룟 유다는 나중에 부정적이 된 그의 신념과 일치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의 행위는 계획적이고 고의적인 것이었죠. 나중에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유다는 예수를 배반한 다음에 뉘우치고, 팔아넘기는 조건으로 받은 검은돈을 돌려주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목매어 자살하였습니다. 그는 필시 자기가 저지른 범죄의 극악함과 아마도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공포감에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죄책감과 절망감을 느끼며 심지어 자괴를 느끼기까지 하였지만 회개로 이끄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을 나타냈다고 볼 만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아니라 유대인 지도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돈을 돌려주었는데, 필시 그렇게 하면 자기 범죄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배신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데 협조한 범죄에 더해 자살이라는 범죄까지 저질렀습니다.
예수는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입니다.”(마태 26:24)라고 하셨지만 베드로의 경우는 그 부인한 행위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한 책임을 맡겼죠.
오늘날의 절대다수의 사람은 죄를 짓고 살지만 죄의식 자체가 없어 유다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념적으로 도덕관 자체를 자신들에게서 없앤 사람들입니다. 90% 이상이 욕을 하지만 욕을 문화라고 생각하죠. 조금의 죄의식도 없습니다. 오히려 친밀감과 신뢰감의 표현수단이라고도 합니다. 욕을 권하는 사회라고도 합니다.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행위를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 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어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도 의미가 없게 된 상태입니다.
사상, 가치관, 신념과 일치하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이나 유물론과 같은 무신적 사상의 영향이 크죠.
그래도 서두의 성구에서의 내용을 전달받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희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죽음을 초래하지 않는 죄를 짓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해 청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아니, 죽음을 초래하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음을 초래하는 죄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죄에 관해서 요청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가 죄이지만, 죽음을 초래하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요한1서 5;16,17)
회개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불의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없습니다. 짐승에게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의미가 없는 것이죠.
인류의 99% 이상이 이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습니다. 단지 문자적인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지금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이 진짜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