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을 읽지 못하기때문에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진리의 절대성 그보다 더 진리의 유일성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죠. 진리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합니다. 다름 혹은 다양성을 존중해야한다는 궤변에 깊이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죠. 참이나 선에 대해서 임의적이고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것도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죠. 세상의 풍조에 땨라.
견해 차이가 있는 경우 논쟁을 하게 되면 끝이 없고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체험때문에 존중해주는 것이 좋다는 태도를 갖게 되죠. 정치나 종교의 쟁점사안에 대해 대화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기도 합니다. 개인마다 생각이 다를 정도이죠. 무의식 자원에서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생각에 대해서 상대도 마찬가지이죠. 개인 뿐 아니라 국가적인 쟁점에 대해서 국가간에 다른 주장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죠. 진리라는 것은 조정이나 융통성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구속력을 행사할 뿐입니다.
미시세계의 전파를 예를 들면 노트북을 통해 생생한 동영상을 볼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잔파와 관련된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안정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력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그 수리적 공식이 적용되는 바에 따른 소수점 무한자리까지의 수치로 엄격하게 적용됩니다. 모든 법칙의 작용이 절대적인 것처럼 진리의 작용도 그러합니다.
다양성이나 상대성, 임의성은 전적으로 무지에 기인합니다. 진리는 다른 견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이거나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가치관들은 반드시 자기파괴에 직면합니다. 상대적인 가치관이 옳다면 절대적으로 옳아야 하는 것이죠. 옳지 않을수도 있다면 상대적인 가치관이 틀린 것이 됩니다.
그렇게 형성된 사람들의 에고는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이 될까봐 두려워하죠. 그래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등을 돌리죠. 진리에 대해서 그러합니다.
이웃에게 진리를 말해야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영적 진리는 인간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달된 것을 이해하는 것이죠. 귀를 열고 들어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진리가 아닌 것이 뻔한 자기의 생각에 대한 집착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죠.
사견(私見)은 사견(邪見)입니다. 개인적 생각은 다 틀린 것이죠.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적 생각이 될 수 없습니다. 2+3이 5라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라고 말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절대적이고 유일하다는 인식은 인간으로서 필수적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그를 온갖 거짓과 악으로부터 지켜줄 뿐 아니라 질병과 노쇠 그리고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