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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누구를 죽여야 하는가?

by 법칙전달자

무엇을 누구를 죽여야 하는가?


성서에는 몸의 지체를 죽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비유적인 죽임에 대한 언급들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눈하나 깜짝하거나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못하죠.


성서에서 육이라고 할 때는 신체를 의미하지 않고 '부도덕한, 불법적인, 범죄적인'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영이라는 단어도 '의로운, 선한, 올바른'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요. 육적인 사람은 죽게 되고 영적인 사람은 살게 되죠. 육적인 사람은 성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부를 추구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경멸하고 배척하죠.


이런 면에서 자신을 죽인 사람은 음란물을 보려고 마우스를 클릭하는 그런 면으로 손가락을 까딱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그런 장면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서 살짝 눈을 깜빡이는 행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타인에 대한 경멸적인 말을 하기 위해 혀를 움직이는 일도 하지 않고 부정직한 거래를 위해 사인을 하는 행동도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그 반대인 사람은 수치를 영광으로 여긴다는 말이 있듯이 성폭행을 하거나 사기로 부당이득을 취하고도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처럼 드러내놓고 자랑을 하죠.


그러나 보통 사랑에게 쾌락이나 물질이 유혹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일을 했다가 불명예를 당하고 낭패를 보았어도 재수 없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걸릴 일만 없다면 다시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것이죠.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 그런 것에 대해 숨은 욕망이나 호기심을 뿌리 뽑고 혐오스럽고 역겹게 느껴야 하는 것이죠. 우연히 어떤 영상이 눈에 띄더라도 구역질이 나야 하는 것이죠. 일확천금하는 제의에 대해서도 분개를 느껴야 하는 것이죠.


마음에 쾌락이나 이득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되는 일이 없어야죠. 역겹고 더럽고 가증스럽게 느끼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만 진정한 행복과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짜릿할 것으로 생각되는 그 범죄적인 행동이 실제 행복이 되지 않는다는 원리를 확고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호기심과 욕망에 못 이겨 자신의 동청을 매춘부에게 바친 대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경우가 있는데 85%가 모멸감과 후회라는 부정적인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묻지 마 관광을 통해 불륜의 관계를 가진 친구에게 어땠어라고 물어보면 그다지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하는 것이죠. 성서에도 자기 이복동생인 다말을 겁탈한 암논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대단한 환상적인 쾌락을 경험할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전혀 그게 아니어서 실망스러운 나머지 미움을 갖게 되어 내 쫒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부당한 욕망이나 호기심이 전혀 생가지 않는 마음 상태를 갖는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는 면으로 손가락을 까딱하거나 눈을 깜빡이는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신의 의식을 원천적으로 바꾸는 것이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집스럽고 반복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죽여야 하죠. 타인에게 줄 고통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럴 권리가 원래 인간에게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대리인이나 신의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은 일시적인 권한이 있는 경우 인간은 신을 대리해 그렇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인간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쾌락과 이득을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추구하려는 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있는 사람은 죽게 될 터인데 안타깝게도 인류의 90% 이상이 그러합니다. 관련된 모든 통계수치가 이를 알려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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