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운 단두대
남경대학살 때의 일인데 민간인을 포함 30만 정도를 학살했다고 하는데 두 명의 일본군 장교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한 시간 동안에 누가 목을 많이 자르나 하는 내기였는데 대상자들은 무릎 꿇고 앉아 손이 뒤로 묶인 상태에서 최대한 목이 잘 잘릴 수 있게 목을 수그리고 있었죠. 목은 떨어지면서 철벅철벅 하는 소리를 냈는데 11살 된 한 소년의 경우 찍하는 쥐소리가 났다는 것이 목격자의 증언입니다. 시간당 1,000명 이상 죽였다니 3초 정도에 한 명씩 죽인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죽기 위해 목을 죽 늘이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80억을 그렇게 꿇어 앉혀 놓고 저승사자들이 그렇게 목을 치는 것인데 오늘도 10만 이상의 사람들의 목이 날아갈 것이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몇 년씩 혹은 수십 년씩 기다리고 있는 셈이죠. 지금 이 순간에도 목은 계속 잘리고 있죠.
한 무협사극의 주제곡의 가사에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죽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싸우라는 것인데 모순된 말인 것 같았습니다. 두 번 죽는다면 한 번은 죽어 볼 수 있겠지만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목숨이니 조심스럽게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물론 그 말이 지닌 다른 의미가 있겠죠.
무협 드라마의 한 장면인데 어떤 남녀가 범죄로 당국에 잡혀 참수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이 절친이 그들을 찾아가 너무 겁내지 말고 죽으라고 격려하면서 내가 너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은 내가 죽여주는 것이지라고 하였습니다. 관원이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의식을 끝내고 형을 집행하려는 찰나에 그의 친구가 쏜살같이 형장으로 말을 타고 뛰어들어 그 두 친구의 머리를 동시에 잘라주고 쏜살같이 달아났는데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목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혹시나 도수부가 실수하여 자신의 친구들이 찰나의 고통이라도 느끼게 될까 하는 배려에서 그렇게 한 것이죠.
그리고 보면 단두대는 참 은혜로운 물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는 것은 안 두려운데 죽기 전의 괴로움이 두렵다고 하기도 하거든요.
일본에서도 할복하라고 요구하는 경우 그 사람이 칼을 배속에 넣자마자 목을 쳐주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명예롭게 할복한 것이고 대신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 준 것이니까요. 한국에서도 간혹 있는 참수 때 중죄인에게 그 궂은 일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망나니는 술을 잔뜩 마시고 잘못 칼을 휘둘러 사형수가 비명소리가 지른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인들이 인질을 참수하는 것을 동영상으로 찍어 공개하는 것을 보았는데 칼로 단번에 목을 베는 것이 아니라 식칼 같은 것으로 목을 썰어서 베는 것이었습니다. 몇 초간 악 하는 비명을 질렀고 그러고 나서는 표정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큰 앙심을 품은 사람이 상대를 죽일 때는 큰 고통을 주는데 한고조의 아내 여희가 척부인을 죽인 사례는 유명하죠. 손발톱 빼고 눈, 코, 귀, 입 손발을 천천히 자르고 가능한 오래 생명을 유지하게 약을 썼다고 하죠, 가톨릭에서는 신도들이 성서를 보지 못하게 했는데 지니고 있다가 발각되면 성서를 물에 적신 다음 가슴에 댄 상태로 화형 시켰는데 가능하면 고통을 오래 겪도록 그렇게 했다고 하죠. 그들은 온갖 형태의 고문도구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죠.
맨발로 압정 같은 것만 밟아도 악 하는 비명을 지르죠. 예수는 발목과 손목에 굵은 못이 박힌 채 채중이 실린 상태에서 한 3~6시간 정도 기둥에서 매달려 있는 고통을 당했죠. 형별 중 가장 고통스러운 형이 톱질형이라고 하는데 거꾸로 매달아 놓고 가랑이부터 천천히 톱질을 해 가는데 그 톱이 배, 가슴, 목에 이르기까지 피를 철철 흘리며 비명을 지르면서 죽었다고 하죠.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는 마취제가 없는 시절에 부득이 절단수술을 받는 경우죠. 팔 하나 다리 하나 없더라도 사는 것을 택할 경우 사지를 묶어 놓고 잘라낼 수밖에 없는데 그 비명과 몸부림은 참으로 끔찍하죠. 그 장면을 그린 화가들의 그림들이 있죠.
오늘날 교수형이나 전기의자형 혹은 총살형은 참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단두대는 참으로 은혜로운 물건입니다.
오늘날은 약의 힘으로 예전보다 수십 년씩 더 살고 죽을 때도 편하게 죽죠. 효과 좋은 진통제들도 많거든요. 예전보다 오래 살아 죽기도 늦게 죽지만 출생도 몇 십 년 전에 비해 파격적으로 줄고 있죠. 예전에 황제도 못 누리는 그런 재미있고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아름다운 경치 보면서 유유하게 여행이나 다니면서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삶인데 자녀에게 수십 년간 얽매이기 싫은 거죠. 한편으로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별 두려움 없이 하루하루를 쾌적하게 사는 사람의 수가 이전 어느 때보다 많죠.
대부분 부모나 조부모보다 오래 살죠.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원수입니다. 마지막으로 멸망받을 원수가 죽음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죠. (고전 15:26) 성서가 그 소식을 위해 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노예로 수천 년간 살아왔죠. 사랑은 죽음처럼 집요하다는 말도 성서에 있는데 죽음은 아무리 건강하고 젊고 힘센 사람이라도 집요하게 쫓아가서 결국 삼키고 말죠. 삶의 순간들이 너무 생생하다고 해도 인간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창조주의 마련을 적극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참사랑을 추구한다면 사랑이 그에게서 집요하게 죽음을 몰아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