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를 얻으려면
인간의 의식세계의 현상은 양자 세계와 비슷한 점이 있어 언제 어디서 어떤 생각이 어떻게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인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원리를 영구히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성서에 그렇게 명시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죠. 인간이 만든 것 예를 들면 컴퓨터의 작동원리나 내부구조는 그 제작에 직접 참여한 전문가들은 알 수 있죠. 그러나 그와 비교도 안되게 복잡하고 정교한 세포, 그리고 그러한 컴퓨터를 만든 인간의 의식 자체 등등 어떻게 보면 인간 스스를 형성하고 있는 그 본질을 알리가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해 보입니다. 드러난 것은 인간에게 속하지만 오묘한 것은 여호와께 속한다는 말이 있죠. 인간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인간에게 알 수 없게 하였다는 직접적 언명도 있는 것이죠. (전도서 10:11)
양자붕괴라는 용어가 있죠. 하나의 양자는 전 우주 어디에도 있을 수학적 확률이 있지만 관찰하는 순간 하나의 위치로 확정되고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없어진다는 것이죠. 이게 맞다면 창조주가 그렇게 만든 것이죠.
인간은 의식에서 떠 오를 가능성이 있는 오만가지 생각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배척해 버릴 수 있고 어떤 기준에 의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인지 지침이 주어져 있죠. 부정적인 것과 악한 것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릅니다.
인간은 권위자에게 혹은 호의를 얻기 원하는 사람에게 선택이 되거나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치장을 합니다. 또 다른 이유에서도 신체나 외모를 관리하죠. 헬스를 하고 좋은 옷을 입고 메이크업에 신경을 쓰죠. 보통 육적인 시각에 익숙한 사람들은 외모로 판단을 하고 선택을 하죠.
사람들은 세상에서 좋은 위치를 점하여 부자로, 또 존경받으며 편하게 살고 싶어 하죠. 그런 복을 베푸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눈밖에 나 배척받는 것은 재앙과 같은 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황제와 같은 최고통치자에게는 그런 권한과 능력이었죠. 세속적으로 그런 관한 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외적인 것을 봅니다.
그러나 창조주는 인간의 내면만을 보죠. 그에 따라 그에 대한 축복과 저주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는 내면의 핵심적인 것인 창조주에 대한 순종, 창조의 법에 대한 순응 심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을 만든 하느님이 그런 것이 없으면 멸망되도록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준을 정해 놓고 순응하면 생명이고 불순종하면 죽음인데 그것은 너희가 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이죠.(신명기 30:19) 아담과 하와에게도 선악과를 따먹는 방법으로 불손종하면 죽게 된다고 선언하였죠.
그분이 인간의 내면에서 멸망의 기준으로 보는 2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교만과 고집이며 이것이 멸망의 선봉이라고 여러 번 명시되어 있죠.
그러나 내면의 그러함만 보고 그에 따라 심판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피조물이 납득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죠.
이집트의 파라오인 경우 여호와는 여러 번 내가 그를 고집스럽게 하였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그가 원래 고집스럽고 교만한 사람이 아닌데 여호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라오는 원래 교만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인데 그런지의 여부가 드러나는 상황이 없다면 주변에서 그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드디어 모세와의 여러 번의 대면과 상황을 통해 그가 매우 완고한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면에서 그를 완고하게 하였다고 표현한 것이죠. 그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가운데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보호차원에서 그에 대한 멸망을 집행하였죠. 그런 멸망을 피할 많은 기회가 있었는 데 그는 완고히 거절하였고 그것을 공격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내다가 처하게 된 멸망에 대해 하느님을 부당하다 할 수 없게 된 것이죠.
인간의 내면의 교만과 고집스러움을 보고 어떤 집단 차원의 멸망을 여러 번 예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120년 전에 예고되었고 전파되었죠.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은 그 200년 정도 전부터 예언되었고 유다의 경우도 그 직전까지 예래미야를 통해 멸망되지 않으려면 항복하라고 경고하였죠. 요나가 앗시리아에게 멸망을 경고했을 때는 그들이 이에 응하여 회개했기 때문에 그 당시 멸망이 집행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다의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은 그 예언대로 이루어져 멸망되었죠. 기원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한 40년 전부터 예언되었습니다. 죽지 않으려면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이었고 66년에 그런 기회가 있었고 순종한 사람들은 멸망을 살아남았죠.
고집스럽게 항복을 하지 않던 일본에 핵폭탄을 떨어트리기 며칠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주민에게 미군은 미리 전단을 뿌려 이점을 알렸다고 하죠. 그 내용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도피한 수천 명의 사람들은 재앙을 면하였죠.
문제는 오늘날입니다. 성서에 멸망직전에 일어날 것으로 예언된 일들이 사실상 거의 성취된 상태입니다. 살려면 비유적인 방주, 영적 방주에 타야만 하는 것이고 한 천만 정도의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죠.
자신의 의식을 교만과 고집에서 벗어나게 한 사람들이죠.
물론 무신적인 세상에서 대부분 이런 말에 대해 콧방귀를 뀔 것입니다. "아직 저런 무식한 사람이 있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하면서요.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상의 교육을 받고 심사숙고하여 갖게 된 가치관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성서의 생각보다 나은 생각으로 여기면서 그 생각에 대한 아마도 무의식적 차원에 이르기까지의 큰 고집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생각이 진리라고 확신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전하여야 할 텐데 그런 것이 아니면서도 죽으면 죽었지 바꾸지는 못하겠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죠. 그 내용에는 진리인 것으로 증명된 것에 대한 부정적인 것들이 많은데 부정적인 것이라고 바로 악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악에 동참하게 되죠. 세상의 악에요.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다가 마침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 외적인 것을 꾸밉니다. 그래야 유리한 입장에서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저만 같아도 사람을 볼 때 그 껍데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영혼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죠. 그가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나 돌이킬 수 없이 굳어져 있는지 보이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게 파악이 되죠.
글이 길어져 결론에 이르면 창조주의 눈을 의식하고 그분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 속사함을 가꿀 필요가 있는데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과 고집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 더 나은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과 태도가 그것이죠. 진지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거부해 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