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과 아름다운 소망
인간의 삶은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타의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자기에게 그렇게 주어진 조건을 비교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이죠. 거울을 보고 나는 왜 이렇게 못 생겼나 하고 느낄 때가 있는 것이죠. 다른 조건과 환경들이 열악하고 타인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가 있는 것이죠. 자신은 자신의 주변에 목격되는 그 누구에 비해 결코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 있지 못함도 알게 됩니다. 어디 취직했다가도 며칠 만에 해고되는 일을 자주 직면하게 되죠. 그의 성격이 사납고 거칠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듯이 공격적이고 호전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마음에 질시로 가득 차서 납득이 안 되는 증오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죠. 사실 그나 그녀를 보면 그럴만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1960, 70년대는 한창 가난을 딛고 일어나는 기간이었고 사업도 실패하고 건장도 안 좋은 한 남자가 가출하였고 그의 아내가 극도로 가난한 상태에서 초등학교 1,2, 4학년인 그의 세 자녀를 감당하게 되었고 그는 식당일을 비롯하여 밤늦게까지 온갖 잡일을 하였고 가능하면 반찬 같은 것을 얻기도 하고 가끔 라면과 단무지를 특식으로 근근이 그의 세 자녀를 좁은 단칸방에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가정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죠. 학교에서 아이들과 싸우고 두들겨 패고 하였겠죠. 그러면 상대 부모에게 항의가 들어오고 치료비 물어달라고 할 것이고 교사도 불러 주의를 주겠죠. 그는 종교가 없더라도 "신이시여!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하고 본능적으로 하소연하게 될 수 있습니다
꺾인 상한 갈대, 연기 나는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는 창조주의 약속이 있습니다. 한 때 창조주는 일부 인간들에게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거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것은 곧 끊어져도 믿음, 희망, 사랑은 계속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뭔가 소망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는 인간은 없죠.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조건상 완전하고 이상적인 사회에서도 소망이라는 것은 갖게끔 되어 있습니다. 인간 정신의 한 본성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이 산소망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산소망이란 법칙과 일치한 것으로써 실제 이루어질 소망인 것이죠. 그것은 인간이 무엇을 근거로 소망을 갖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어떤 소망이냐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죠.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믿음이죠. 소망을 갖는 데 있어서 경험이나 사견 혹은 사욕에 근거를 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경험은 과거의 어떤 것이고 소망과 믿음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원래 이상사회에서 인간의 삶이란 소망을 갖고 이루어지고 또 새로운 소망을 갖고 이루어지고 하는 것의 연속인 것이고 이상사회에서의 소망은 달리 환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환상을 갖고 그것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환상을 갖고 또 이루어지는 삶이 원래의 인간의 삶이죠.
진리에 기초한 참 소망과 믿음은 실현됨으로써 바뀌거나 조정이 되죠. 사랑은 불변인데 참 소망이나 믿음도 사랑에 기초한 것이 됩니다.
위의 두 사례의 경우도 이상적인 세계가 도래하기도 전인데 소망을 성취시키고 있죠. 지금은 다른 소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금 갖게 되는 소망과 이상사회에서의 소망은 성격이 다른 것일 텐데 성취될 소망을 현재 선택하는 것은 앞으로는 없는 특별한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