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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Jun 09. 2023

추상적으로 추리할 수 있어야

추상적으로 추리할 수 있어야 


추상적으로 추리하다, 개념적으로 사고하다, 추상적으로 사고하다, 개념적으로 추리하다. 다 본질상 비슷한 의미입니다. 여기서 사고나 추리란 상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필이나 소설, 시적인 그런 정신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한 진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진리에 도달하는 그래서 그것을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것을 발명해 내는 그러한 것입니다. 학문적인, 논리적인, 과학적인 사고를 의미합니다. 인문과학적, 자연과학적 사고가 모두 해당되죠. 반드시 개념 즉 기존에 확립된 진리, 법칙, 원리에서 출발하여 추리를 해야 하는 것이죠. 짐작이나 가정에서 시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논리는 개념-추리-판단이라는 공식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죠. 


우발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 어떤 영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그것들은 추리의 단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자체도 본질상 신빙성 있는 개념인 경우 추리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것이죠. reminder 즉 생각나게 하는 것에서 출발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어도 일종의 영적 근원에서 입니다. 평상시에 선한 영을 구한 사람이라면 좋은 생각이 떠 오를 것이고 세상의 혼탁한 영을 호흡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뭔가 사기적인 아이디어 같은 것이 떠 오르는 것이겠죠. 


개념의 의미를 폭넓게 적용하면 나쁜 의미의 개념도 개념이기 때문에 나쁜 추리도 할 수 있는 것이죠. 돈이나 악, 어두움에 대한 사랑도 사랑인 것이나 마찬가지이죠. 


추상적으로 추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추상과 추리의 의미를 알아야겠죠. 뭔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것은 집이야, 색은 빨간색이네, 저 사람은 뛰고 있네라고 할 경우 그것은 구체적인 것들이죠. 저것은 동물이야와 같이 집합적인 말도 크게는 구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를 가리켜 저것은 모양이야와 같이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이것은 크기이네라고 말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에만 있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더기와 자동차는 다 구체어이지만 유연관계가 매우 멀죠. 까마귀와 비둘기는 매우 가깝고 까마귀와 소는 조금 멀죠. 마찬가지로 사랑과 모양은 엄청 유연관계가 멀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추상적인 사물(?) 도 방대하고 복잡한 분류체계로 분류할 필요가 있는 그런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상어를 구체어 대신 사용하는 경우를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라는 것은 추상어인데 2를 가리켜 수라고 할 때 그것은 숫자를 대신하는 것이죠. 소설책을 그냥 소설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추상적인 것이란 인간의 정신에만 있는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 이미 확립된 원칙, 진리에서 추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추리란 새로운 판단에 이르기 위한 사고의 전개입니다. 여기서 추리한 혼자 하는 추리를 의미하고 둘이서 하는 추리와 성격이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리할 때 이미 확립된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경험은 모두 합해야 원칙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감정, 경험, 사견이 깃든 그런 것에서 시작하면 결과가 반드시 오류에 빠지게 되죠. 

이렇게 엄격한 논리적인 추리가 아니라면 사람은 일상적으로 어떤 면에서 추리를 하면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어제보다 나은 생각에 도달하지 못하죠. 혼미한 찰학적인 세계를 방황하는 그러한 추리가 될 뿐입니다. 사고는 편견의 재배치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는 것이죠. 


만약 올바르게 추리하여 얻어진 결론이라면 그의 인생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혁신적으로 방향전환을 해주는 그런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올바른 추리를 하여야 하겠지만 통계적으로 일생에 한 번이라도 하는 경우기 드물다고 합니다. 개념적으로 사고하고 추상적으로 추리할 줄 모르는 것이죠. 


통찰과 추리는 지능의 2대 근간입니다. 통찰은 우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인데 뉴턴이나 이인슈타인처럼 위대한(?) 물리적 통찰을 하게 된 사람도 있고 칸트처럼 사상적 통찰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통찰을 생애 한 번도 못하는 것이죠. 


추리는 논리적 필연성을 띈 과정이기 때문에 훈련을 받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교육 과정에 심지어 논리학시간에도 그런 훈련과정은 없습니다. 그런 추리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노예로서 살게 되지 않게 되죠. 세상 통제자의 통제밖으로 벗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는 추리를 하여 위대한(?) 발명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통찰의 의해 발견된 법칙, 원리, 성질에서 출발하여 컴퓨터, 휴대폰, 자동차 등을 발명해 내는 것이 그것이죠. 물리적으로는 계속 그런 식으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죠. 그런 추리법은 확립되어 있어 시간문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상적인 추리, 영적인 추리는 세상에 교육기관이 없어 개인적인 통로를 통해 개인 차원에서 그렇게 해야죠. 진정으로 그런 추리법을 원하는 사람은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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