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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칙전달자 Jun 09. 2023

부모라고 하는 것은

부모라고 하는 것은 


아기가 태어나면 그는 전적으로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생명유지와 성장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려 있죠. 부모는 자녀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이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스트로게라고 하는 것이죠. 이는 배타적인 것일 수 있고 경우에 따라 병적인 집착이 곁들 여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출생한 아이가 안전하게 성인으로 될 수 있도록 한 창조주의 마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부모로서 자녀에게 갖게 되는 본연의 애정이 고전적인 관념이 되는 것 같은 면도 있어 보입니다. 구시대와 여러모로 이점에 대한 가치관도 변화가 있어 보입니다. 


생장기에는 절대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고 또한 인생에 대한 경험의 시간적 비율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고 부모는 순수한 동기로 자녀의 진정한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자녀는 부모에 순종해야 되죠. 부모의 지시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원칙인 것이죠. 그런데 나이가 들면 역전이 되어 부모는 신체적 지적인 면에서 퇴보하게 되고 도리어 부양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통사회에서 부모에 대한 효나 공경은 기본적인 덕목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이 시각으로 보면 과한 면도 있는 정도이죠.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 차원으로 경전 등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죠. 위에 언급된 세 가지 측면에서 어쩔 수 없이 그래야 되는 측면이 있죠. 과거에는 부모의 자녀에 대한 권한이 거의 절대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의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단지 생명의 전달자이고 초기의 양육자이죠. 지금은 몇십 년밖에 못 사는 삶이어서 그러하지만 원래는 지금처럼 살라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정성적이라면 어떠할 것입니까? 아버지는 나이가 16,789세이고 아들은 16,758세라고 할 때 지금과 같은 비율적인 차이는 전혀 없게 되는 것이죠. 부모가 그 부모에게 그러했듯이 단지 생명의 전달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겉보기로도 누가 나이가 더 많은 지 손위인지조차 구별이 안되죠. 부모뿐 아니라 30세대 정도 위의 세대라도 그렇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조상개념은 없죠. 물론 특별히 친밀한 관계는 될 수 있겠죠. 인류는 모두가 한 혈통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을 근거로 "우리가 남이가?" 하는 배타성 있는 '우리' 개념은 없어지죠. 천년, 어떻게 보면 잠깐 지나가는 세월입니다. 천년이 아니라 100년도 채 못 사는 오늘날의 인생이 지극히 비정상적입니다. 곧 노인과 병자가 없는 세상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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