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야

by 법칙전달자

덮어야


"조상의 빛나는 얼을 오늘에 되살려"라는 표현이 있죠. 조상의 얼이란 실상은 부패하고 탐욕스럽고 추익한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공자 같은 사람도 40이 불혹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굴복했을만한 미혹되는 경우들이 있었음을 의미하죠. 인간은 돌이키기 싫거나 지극히 후회스러운 부끄러운 과오들이 있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시달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유흥가, 홍등가, 사창가 그리고 그와 비슷한 업소들이 있는데 이런 곳에 일한 전력이 있거나 관계한 경험이 있는 여자들은 남편 될 사람과의 교제 중에 절대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분문율도 있죠.


그런 측면은 아니더라도 결혼 후에 남편이 성형하기 전의 아내의 모습을 알게 되고 나서 놀라서 이게 당신의 본모습이었어?라고 하면서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죠.


드러내고 싶지 않아 감추고 싶은 그런 과오를 가진 개인들은 많습니다. 정치판에서도 정적들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그런 과오들이 있지나 않나 탐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참 뻔뻔스러운 작테이 긴 한데 어떤 사람이 타인의 결함을 비난할 때는 적어도 다른 면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면으로는 나는 그렇지 않다는 전제 하에서인데 이런 면에서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죠. 그 사람이 실상은 더한데 자기의 그런 치부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일까요?


반면 기록에 보면 관용적인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의 과거의 한 통치자도 참모들이 한 정적에 대해서 그가 숨은 딸이 있는데 드러내서 정치적으로 사장시킬까요?라고 제의했는데 그는 남자의 아랫도리와 관계된 일은 터치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대개는 상대들의 치부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가 유사시에 드러내서 그를 치는 빌미로 사용하는 경우들도 많은 것이죠.


지역적으로 영웅으로 추앙받고 동상이 세워진 사람들 중에 불미스러운 일화를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중국의 마오쩌둥의 경우도 술집에서 여성들의 옷을 벗겨 엎드리게 하고 돌아가면서 엉덩이를 찰삭찰삭 때리며 장난을 쳤다는 것이죠.


살신성인하여 영웅이나 준 성인으로 추앙받는 경우에도 타인이 알면 충격적이 될 그런 추한 과거들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국가적으로도 비숫합니다. 어떤 면은 미화하고 부정적인 면은 감추려 하는 일색이죠..

일본이 조선의 통치기간 중에 압제하고 수탈하였다는 것이죠. 강제징용을 했고 강제로 위안부를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 사람은 전혀 없을까요?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소속되어 앞장서 잔학 행위를 한 사람은 없을까요?


타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월남으로 파병하여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할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는 것이죠. 그 잔학성 때문은 전혀 아닐까요?


사람이 자라면서 10대 후반 그리고 20대에 들어서게 되면서 여러 음성적인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는데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지에 대해 부모나 교사로부터 거의 교육받지 않습니다. 의에 대한 교육, 올바름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는 것이죠. 부모나 교사나 조상들도 대개 그러했다고 할 수 있죠 전통적인 교육적 가지관도 사라져. 오늘날은 이런 면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는 상황들이 훨씬 더 심각해졌죠. 공부란 대개 출세를 위한 지식 쌓기에 집중되어 있죠. 거의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적어도 불미스럽고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더 나아가 악한 행위들에 연루되거나 가담하게 되죠.


물론 온상 같은 환경에서 부모의 감독과 보호 하에 소위 조신하게 잘 자라,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관용이라는 미덕을 지니거나 보인다는 차원에서 혹은 자신의 그러한 과오가 덮어졌으면 하는 전제에서 감정이입을 사용하거나 자기 본위적으로 추리하여 타인의 과오들을 전혀 개의치 않거나 간과하면서 그들을 대하는 경우가 많이 있죠..


성서에서도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선만 행하는 의인은 전혀 없다고 하죠. 이런 면에서 완전한 사람은 예수 한 사람뿐이죠. 그렇다고 해도 예수는 그런 면으로 타인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누군가에 대해 손가락질할 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착각이나 고의적 외면하에서 그러하겠지만 타인의 그런 과오로 자신은 직접적인 피해를 전혀 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허물을 소위 안주 삼아 씹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그렇죠.


그러나 극단적으로 상대의 수치스럽고 불미스러운 행위 정도가 아니라 고의적인 사악함으로 자신에게 지대한 피해를 끼쳐 죽이고 싶은 원수 같이 된 경우에도 용서하라는 것이 원칙이고 그것도 완벽하고 깨끗하게 즉 여운이 남지 않게 심지어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창조주의 약속은 인간의 허물들을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준다는 것이고 기억도 나지 않게 해 준다는 것이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미덕이기도 하고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것은 성서에 여러 번 장조 되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큰돈을 들여 어떤 부위를 도려내고 모습을 바꾸는 그런 성형을 실제로 하지요.

자신의 속사람, 내면적임 몸, 영적인 몸에도 도려내고 싶은 부위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 때문에 크게 피해를 입거나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는 주변인이 있을 때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지대한 피해를 주어 너무나 큰 죄책감에 짓눌리고 있던 그 사람을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 여인은 그에게 따뜻하게 잊어버리라고 오히려 위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눈빛에서는 분개나 원망의 기색이 전혀 없었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하는 동정의 기색뿐이었다고 합니다.


덮는다는 것의 실제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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