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것이 더 행복하긴 해도
인생의 포부를 말하라고 하면 "출세하고 돈을 벌어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된 사람들에 의한 자선이나 기부행위들도 많습니다.
사적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하고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또 준 것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답례나 대가가 전혀 없는 것을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선물을 받거나 어려운 처지에서 기대치 않았던 도움을 받는 것도 기쁨이 되고 힘이 될 것이며 또 받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주는 사람의 기쁨이며 보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베풀 수 있는 입장이 될 것입니다.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 살아있는 동안의 삶의 의미를 찾는 노력을 많이 기울이죠. 죽기 전에 큰 기부를 함으로써 그런 면으로 최선을 다 했다고 느끼며 개운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물론 상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만 인간 본연의 진정한 행복은 아닙니다. 어차피 죽게 될 인생에서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죠. 허무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든 살아있을 때의 아우성은 덧없이 지나가버리죠. 금방 져버릴 꽃이기에 피어있을 동안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로 위안하려 할지 모릅니다. 살아있을 동안의 그 죽지 않을 것 같은 생생함도 이해할 수 있죠.
예수도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음식을 베푼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서두에 언급된 그런 마음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배 풀리 먹는 것을 보고 마음 뿌듯함을 느끼는 그러한 것은 아닌 것이죠. 그분이 그렇게 한 주된 목적은 그분이 세상에 온 것은 왕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하에서는 굶주림이 없을 것이죠.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한다면 신뢰를 얻지 못할 수도 있죠. 그러므로 실제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그 점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병을 고쳐 준 기적을 행한 것도 그렇습니다. "아무도 내가 병들었다고 말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성서의 예언이 자신이 통치기간에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었죠. 또한 죽음이 멸망될 것이라는 약속도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킴으로써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음을 보였죠. 그리고 그분의 천년통치는 곧 시작되죠.
인간은 아무도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고안해 낸 오만가지 철학은 다 쓸모없습니다. 인간 누구도 스스로 그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그런 철학을 믿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약속에 참 희망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좋은 소식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든 피할 수 없다는 그 허무에의 굴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