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를 받을만하다면
어떤 집단에서 재능이 뛰어나고 더구나 성품까지 훌륭하다면 기존의 세력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견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직책 혹은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그 자리를 목표하는 사람이 많은 경우 그들에게 불안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죠. 시기를 받게 되고 모함을 받게 될 수 있죠.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이런 상황이 연출되죠.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서도 한상궁이나 장금이가 그런 표적이 되죠. 결국 모함에 걸려 죽게 되거나 내쳐지게 되죠.
능력이 있다면 현 세상에서 그것을 발휘하여 큰 공을 세우고 능력에 합당한 권위를 갖고 싶습니까? 물론 드라마에서나 영화, 소설 같은데서는 역경이나 도전들을 극복하고 주인공이 그렇게 되는 경우들이 많죠. 시청자나 독자들은 대리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세속의 시스템에 들어가서 그렇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침몰해 가는 배의 기둥에 페인트 칠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죠. 곧 다 죽게 될 사람들인데 음악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일까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는 어떤 고집 때문에 그 배에서 탈출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죽겠다고 고집스럽게 작정한 사람들 같죠. 그들끼리는 어떤 행동에 대해 칭찬도 하고 서로 격려도 하면서 위안을 얻으려 할지 모릅니다. 그 단편만 보면 아름다운 장면이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모두 어리석고 악한 것입니다. 지헤롭고 선한 것은 그 배에서 탈출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상하게도 탈출하라는 외침에는 공히 귀를 막고 있죠.
예수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 재능이 가장 뛰어나고 성품도 가장 훌륭한 분이죠. 마음만 먹으면 왕도 쉽게 할 수 있었죠. 또 그런 제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세속에 속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고했죠. 바울도 큰 지식과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어 얼마든지 세속적으로 출세할 수 있었죠. 그라나 그는 그러한 것들을 쓰레기처럼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세상에서 배척을 받고 죽음을 당했죠.
이 세상은 이미 확정적으로 절망적입니다. 돌이킬 수 없이 침몰하기 시작하였죠. 이미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시작한 열차와 같죠. 아무도 무엇도 이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드라마나 영화도 그 뒤의 씁쓸하고 허망한 결과들은 생략하죠. 그들이 일시적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그 장면에서 끝을 맺죠. 현실은 여러 우환가운데 살다가 결국 허무한 죽음으로 마치는 것이 인생이죠. 일종의 속임수이죠.
여러모로 세상은 절망적입니다. 그걸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먹거리를 구하는 것이므로 경제적으로까지 완전히 분리되어 산속에서 나물이나 캐 먹으며 살라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마음이나 뜻을 세상에 두지 말라는 것이죠. 직장을 그만두거나 사업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이죠.
마태 24장 40. 41절입니다. '그때에 두 남자가 밭에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하더라도 그 마음의 상태에 따른 결과이죠. 세속에서 성공하는 것을 꿈꾼다면 그 자체가 멸망의 원인입니다.
실제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면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가 침몰해 간다는 것을 깨닫고 탈출하는 선택 이외의 모든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암시조차 하지 않는 것이죠. 이 세상의 배후의 통치자는 모두와 함께 멸망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