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없이
범주나 사유법칙, 문법 같은 것은 무의식 중에 있습니다. 그것은 선험적 혹은 초월적이라고도 하고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틀 혹은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그것이 어법 혹은 문법에 맞는 표현인지 일일이 혹은 그때그때마다 신경 쓰거나 의식하지 않죠. 그렇다면 말하는 것이 엄청 힘들 것입니다.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할 때도 그렇습니다. 관련된 사유법칙이 뭔지 의식함이 없이 그렇게 하죠.
'관계'는 대표적인 범주입니다. 즉 인간이 그것을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본질적이고 분석적으로요. 관계를 짓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진행됩니다.
사람들은 외모가 매력적이라야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죠. 즉 외모의 질이 호의를 얻는 정도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자신이 사랑과 외모를 관계 짓고 있다는 것은 의식하지 못한 채요. 대개 관계 짓는 것은 무의식적 현상이니까요. 또한 자신의 불완전성의 정도에 대해서도 그러하죠. 완벽해야 영광을 얻는다 즉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죠. 당연해 보이는 생각이지만 인간의 무의식 자체가 많이 손상된 상태이기 때문에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정신 현상이 꼭 옳은 것이 될 수는 없죠.
즉 관계와 관련해서는 관계가 없는 것을 관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유법칙을 근본적으로 무시한 주장을 그럴듯한 이론으로 여길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진화론이 그러하죠. 사실 저는 제 글을 이루는 많은 문장들이 엄격하게 따지면 문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심각하지 않은 것은 그냥 넘어가죠. 저도 저의 무의식이 얼마나 손상되어 있는지를 대충 인지는 하고 있죠.
어떤 시각으로 외모의 질을 비교하자면 예를 들면 참새와 공작을 비교하면 그 칙칙하고 화려함의 차이는 뚜렷하죠. 그러나 그것이 우주로부터의 즉 창조주로부터의 호의를 받는 정도에서 차이가 나게 합니까? 좀 비약해서 성서의 한 예를 살펴봅니다.
사무엘상 16장 6,7 절입니다. 그들이 들어오자 그는 엘리압을 보고, “여기 여호와 앞에 분명 그분의 기름부음받은 자가 서 있구나” 하고 말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외모와 큰 키를 보지 마라. 내가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보는 방식은 하느님이 보는 방식과 같지 않으니,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만 여호와는 마음속을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외모를 보고 왕감이라 판단하여 그에게 기름 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는 그 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죠. 관련된 원칙은 외모는 인간이 받게 되는 가장 가치 있는 사랑, 우주 본연의 즉 창조주의 사랑을 받는 정도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새가 공작보다 덜 소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인 것이죠.
또한 자신의 많은 결함들이 호의를 얻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겠지만 말라기 4장 2절에 나타나있는 하느님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 이름을 존중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비쳐서 그 빛이 병을 고쳐 주리니, 너희가 살진 송아지처럼 뛰놀 것이다.”
창조주는 그 사람의 결함의 심각한 정도에 주목하여 판단하지 않죠. 단지 영적 도덕적 상태를 보시죠. 그에 따라 결함들은 치료를 약속받죠. 반면에 그전 구절을 보면 "주제넘은 자들과 악을 행하는 자들이 모두 지푸라기처럼 되고 말 것이다."라고 되어 있죠.
그러므로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외모나 의식되는 많은 결함들에 대해 너무 괘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비하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가죽 한 꺼풀에 불과한 미모라는 것에 큰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죠. 영적인 것을 첫째로 둘 때 완벽한 외모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관련 없는 것을 관계 짓는 과오를 외모와 관련해서 손상된 무의식에 따라 관련지어 실패한 삶이 되게 하지 말아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