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삶과 죽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로새 3:5)
죽은 사람은 눈을 깜빡이거나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행동도 하지 못하죠. 음란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손가락을 까딱하여 클릭하는 행동을 하거나 실눈이라도 뜨고 살짝 보는 행동도 하지 못하죠. 그 정도라도 한다면 그 점에 있어 죽어 있는 것이 아니죠. 사실 그러한 것들은 구역질 날 정도로 더러운 것이죠.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라고 했는데 마음에 혐오스럽게 느껴져야 인상을 찌푸리면서 외면하게 되죠. "그런 것은 보아서는 안되지" 하는 정신 가운데의 원칙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원칙은 마음에 이르러야만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죠.
또 다른 사람에게 그분은 “나를 따르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주여, 제가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 지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분은 그에게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 장사 지내게 하고, 당신은 가서 하느님의 왕국을 널리 전하십시오”(누가 9:59,60) 여기서 뒤의 '죽은 사람'이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의미하죠. 죽은 사람은 필요를 느끼지 못하죠. 산상수훈의 첫마디는 "영적 필요를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이죠.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정신으로는 그 말을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여 예수의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죠.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영적 양식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 반대이죠, 돼지처럼 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양식으로 접근을 하면 자기를 해치려는지 알고 공격적이 되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반면에 영적 가치를 식별하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기 위해 전 재산을 파는 희생이라도 기꺼이 치루죠.
돈을 벌기 위해 생생하게 깨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이라도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어있는 사람일 수 있고 피곤하여 죽음과 같은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순간에도 그는 영적으로 생생하게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육적으로는 죽어 있는 사람이죠.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에 대해서는 눈 깜빡, 손가락 하나 까딱 하는 반응도 하지 않을 정도로 죽어 있죠. 그러나 죽어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 그러하죠. 그 가치를 보지 못해 거부하고 불쾌해하고 배척하죠. 심지어 공격적이 되어 파괴하고 죽이려 하는 것이죠.
사람은 온전히 육적이거나 영적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상충되는 개념이라 10%는 육적이지만 90%는 영적이라는 그런 공존하는 상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갈 5:17)
인류의 99%가 훨씬 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일시적으로 잠깐 살아 있다가 영원히 소멸하게 되죠. 개나 돼지와 같이 짐승에 비유되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천만의 가까운 사람들은 영적으로 살아 있죠. 혹시 육체적으로는 일시적으로 죽게 될 수 있어도 그는 영원히 존재할 사람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