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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by 법칙전달자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여기서 이성과 감성은 논리학 혹은 사상학적 용어로써가 아니라 일상어휘로 사용합니다. 힘이나 일, 집합도 물리학이나 수학적 용어로 사용하면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죠. 지성인 경우도 그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죠. 오성은 일상어휘로는 쓰이지 않으니 그럴 필요가 없지만요. 어휘의 미분화 탓이기도 합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재판관을 계속 찾아가서 ‘저와 제 소송 상대 사이에 공정한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나중에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계속 나를 괴롭히니 공정한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누가 18:3~5) 결국은 이 재판관은 감성에 영향을 받았죠.


그러니 지금 이 일에 대해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저 사람들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 두십시오. 그 계획이나 일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무너질 것이지만,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이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한 다음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근거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한 뒤에 보내 주었다.(사도 5:38! 40)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이었지만 이성적인 판단에 따랐죠.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 칸트의 실천이성이 연상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창조주에 대한 참 숭배가 없는 사람이라도 논리적 추리를 할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논리 혹은 법리란 영적인 것이라기보다 지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세상에서도 그런 면으로 최상위의 의식 수준인 사람들이 법관이 되죠. 논리 혹은 법리적인 면에서 무엇이 올바른지 알아낼 수 있죠.


logos는 이성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그것은 진리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하죠. 인간이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갈등을 느낄 때 사실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조적이고 절대적으로 이성을 따라야죠. 그것이 자신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하더라도요.


인생의 한 목적을 영적 성장이라고 할 때 그 한 면은 이성에 순응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아이가 논쟁을 하는 경우 한 아이가 이성적으로 명백히 옳다 해도 다른 아이가 자기의 아들이어서 두둔한다면 이성을 거스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고려의 여지없이 이성적이 되어야 하고 감성이 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 일치시켜야죠.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즉 감성과 이성이 일치되었다 하더라도 몸이 꼭 그것을 따라 주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을 수 있죠. 인간은 생각, 감정, 행동 즉 의식의 3요소를 온전히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죠.


이성과 일치하지 않은 감성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고 악하고 무가치하고 해로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을 사상학적으로 정의하면 영적 도덕적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영적인 진리와 절대적 도덕적 표준이 있어야 이성이 있는 것이죠. 세속학자들은 아무리 고명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이런 면에서 이성은 없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이성 없는'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죠. 진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이성이 없죠. 소위 그것들 차원에서의 감성(?)대로 행동하는 것이죠. 자연에서 볼 수 있듯이 으르렁거리면서 싸우고 먹고 먹히죠. 세속의 아무리 고명한 학자나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이성은 없어 짐승들 세상의 일부일 뿐입니다. 논리나 법리는 용어적으로는 이성이 아니라 오성 즉 지성에 속하는 것이죠. 짐승들의 세상에서 그런 면이 발달한 사람들일 뿐이죠.


이성이 있고 그것에 순응해야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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