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인 절망
베드로가 예수에게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되냐고 질문을 하자 예수는 77번을 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78번 용서하는 것은 안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완전수인 7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용서하는 횟수가 한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하죠. 혹시 정당하게 복수할 일이 있더라도 복수는 하느님께 맡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9장 4절에는 살아있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희망이 있다고도 하죠.
한편 성서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들이 여러 번 언급됩니다. 단지 영원한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죠. 사랑, 자비, 용서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권고하는 근원에서 나오는 선언들이죠. 그러나 이율배반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 해당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그것은 만물의 속성으로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면은 심오한 측면이 있죠.
누군가 용서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는 그가 돌이킬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결과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러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반역한 영적 존재들도요.
어떤 선택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지요. 이는 사형당하느냐의 여부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에 의해 직접 혹은 그분의 명령에 의해 사람의 손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많은 경우 부활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된다는 것은 희망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인 경우 나는 너무나 심각한 죄를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지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죽을 때까지 죄책감에 젖어있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창조주 보기에도 꼭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 죄의 성격에 따라 진정으로 뉘우치고 그것을 전정으로 미워하게 되었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상황이라면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절망이라고 정죄하는 것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인간들에게는 화를 터트리지 말라고 한다든지 복수하지 말라고 하지만 창조주 자신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전적인 정성을 요구하고 복수하시는 하느님이다. 여호와는 복수하고 주저함 없이 진노를 나타내신다. 여호와는 원수들에게 복수하시며 적들에 대한 진노를 쌓아 두신다. 여호와는 분노하기를 더디 하고 능력이 크신 분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응당한 처벌을 내리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결정적으로 사용한 행동은 원칙상 용서가 안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식부족이나 육체의 약함 혹은 실수로 인한 잘못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성서에서는 인간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 몇 가지를 알려 주는데 하나는 진리를 체험하고 고의적으로 신념적으로 그것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경우이고 하나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체도 아닌데 하느님이나 예수에 대해 욕을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에 대해 욕하는 것은 왜 용서가 안 되는 것이라 하였을까요?
성령을 욕한다는 것은 성령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죠. 그 당시 율법학자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죠. 예수는 그 당시 성령을 힘 업어 여러 기적들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기적들은 대중들 앞에 공개적으로 행해졌고 너무 현저한 것이라 아무도 그 초능력적이고 초자연적임을 부인할 수 없었죠. 예수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증오하고 있었던 그 반대자들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그러한 기적이 하느님의 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죠.
그런데 그들은 사탄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모함하였죠. 즉 성령을 사탄의 영이라고 모독한 것이죠. 용서받을 수 없는 성격의 죄라고 예수는 규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식을 바탕으로 한 계회적이고 고의적인 언어적 죄는 용서가 불가능한 것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알 기회가 반복적으로 그리고 간절한 접근으로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함으로 인한 무지에 의한 진리의 거스름도 그러합니다. 절대다수의 인간들이 그에 속하죠. 사실 이도 근원적으로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광신적인 종교적 메시지로, 무식한 사람들이 사탕발림 같은 종교의 교리에 미혹되어 생긴 맹신으로 인한 것으로 나름대로 규정을 하고 완고하게 혹은 태도상으로는 완곡하거나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죠.
그들은 과학에 대한 신봉으로 인한 완고한 회의주의나 유물론이나 진화론 같은 무신적 사상을 심사숙고 끝에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죠. 한편으로는 나름대로의 신념에 의해 존중하기도 해주는 경우들이 있죠. 한국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광신자들이나 극단주의자 정도로 여길지라도 사법적 처벌은 인권침해라고 하여 대체복부로 바뀌기도 하였죠. 그러나 러시아 같은 데는 그들의 활동이 금지되고 재산이 몰수되고 징역형을 받기도 하죠.
많은 사람들이 용서가 안 되는 태도를 확정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오히려 좋은 소식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마음 놓고 멸망을 집행해도 되기 때문이죠. 생명의 초대에 응할 만한 사람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응하여 비유적으로 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나와 영적 방주를 타고 있는 상황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