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제와 인내
사람은 당연히 멸시받기보다는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자신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겉으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상대가 마음으로 자신에 대해 그렇게 하고 있고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마땅한 것이라면 수치를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이고 삶의 목적을 거스리는 것이죠. 수치심이 극에 달하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의 의식 상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의 인간의 의식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고 어떤 생각과 어떤 충동이 언제 어떻게 떠오를지 모르죠.
욕을 하거나 화를 터트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고 심지어 두들겨 패거나 죽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급한 성적 욕구를 되는대로 해소하고 싶거나 흡연이나 마약을 끊었던 사람이라면 간절히 다시 한 모금 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미친 듯이 크게 소리치고 싶거나 술에 만취되고 싶을 때도 있겠죠. 물건이나 돈을 슬쩍하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고요.
한편 자체는 생명이라는 말이 있죠. 자체는 그릇된 충동을 억눌러 실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힘이죠, 순발력에 비할 수 있는 인격적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제에 실패하면 멸시의 대상이 되는 행동을 하게 되죠. 설령 아무도 그것을 목격하지 못했다 해도 스스로의 지탄이 되기도 합니다.
억누르는 것이 자제라면 버티는 것이 인내입니다. 어떤 신념을 타협시키느라 가두고 굶기고 욕을 퍼부어대는 경우 그것이 싫어서 신념을 포기하는 것은 인내에 실패하는 것이죠. 병이 들어 몸이 아파 지속적인 통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좀 참으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약을 한다면 상횡이 더 악화되죠. 인내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인내란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그것을 벗어나려 일탈행위를 하면 그것이 배신이나 불의한 타협, 부도덕, 범죄, 상황의 심각한 악화 같은 것이 되기 때문에 일탈행위를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을 의미하죠. 지구력에 비할 수 있습니다.
이 자제와 인내는 신의 성품에 이르는 단계에 포함되어 있고(베후1:6) 성령의 열매에 속하기도 하는 것이죠. 단 성령의 열매에는 인내 대신 오래 참음으로 되어 있죠. (갈 5:22)
자제와 인내에 실패하면 존경을 상실하거나 우려의 대상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참인간으로 승인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본 특성과 관련하여 진지하게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도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순발력과 지구력이 꼭 필요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