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함이란
인간은 거의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고 하고 완벽주의자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여 극단선택을 하기도 한다고 하죠.
인간에게 완전, 완전무결에 대한 추구가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완전이란 무엇입니까? 그 역시 용례의 문맥에 따라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개념을 정의하는 방식이며 원리가 되는 것이죠.
우선 인간이 지식 혹은 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결코 전지나 만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 그럴 수도 없고요. 단지 지적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이 된다는 것을 의하며 그것으로도 엄청나게 부러워할만한 것입니다. 정서적 완전도 그러하고요.
신체적 혹은 외모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절세의 미모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구비되어 되어 있고 형태상의 이지러짐이 없고 각 기관들이 순조롭게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나쁜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혹은 불가항력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죠.
인격적으로 덕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역시 통제할 수 없이 부덕한 행동을 하게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 관한 완전성을 더 다루기에 앞서 법칙의 완전성, 창조의 완전성을 살펴보면 우주는 전체 질량에서 지금보다 전자 하나만큼이 더 하거나 덜하거나 해서도 안된다고 하죠. 중력 상수처럼 법칙과 관련된 수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주율(파이)처럼 무리수이겠지만 소수점이하 100자리 정도에서라도 수치가 달라지면 우주는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정교하게 정해져 있으며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죠. 만물은 절대 완전성을 지닌 법칙으로 운영되는 것이고 그 창조의 근원 역시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하고 필연적으로 그러하죠.
그런데 그러한 법칙 중 불확정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만물의 본질이기도 하고 인간의식의 본질이기도 하며 법칙 중 가장 심오하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본질이 그로 인한 것이기도 하죠.
지금 제가 특정한 장소에서 지금과 같이 글쓰기라는 행동을 하는 것은 미리 프로그램된 바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정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죠. 이곳에서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24시간 전에도 결정된 것이 아니죠. 제가 숲을 산책하면서 육안으로 보게 되는 것과 꿈에서 혹은 평상시에 뇌로 보게 되는 영상들 또한 그렇죠. 그러한 꿈을 꾸고 그러한 영상을 보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 역시 모든 면에서 불완전합니다. 기능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죠. 그러나 완전했다 하더라고 인간의 생각에는 어떤 생각도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들은 나름의 이상적인 원칙으로 판단한다면 부정적인 것이 될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을 불완전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불확정성의 완전성으로 인한 것이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완전성을 잃게 되었죠. 신체도 기관, 조직, 세포 단위에서 점차 기능도 정상적이고 순조롭게 작동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멈추어 죽게 되었죠. 그런데 그들이 완전성을 상실하기 전에도 선악과를 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죠. 그것은 창조의 불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불가능하게 프로그램되었다면 선악과도 필요 없죠. 이는 인간이 아니라 영적인 자유도덕 행위자인 천사 같은 영적 피조물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식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그러하죠.
인간뿐 아니라 심지어 동식물들도 불확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일 어느 시점 어느 위치에서 청설모를 보게 될지 알 수 없죠. 어느 지역에 떨어질 낙엽의 수나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여러모로 불완전하게 되어 관련기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통제할 수 없이 불미스러운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죠. 그런데 예수의 대속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마련으로 완전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완전성을 상실한 이전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불확정성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성이 완전해졌다는 것은 자기 통제를 번명의 여지없이 온전히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완전하여 즉 병적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였다는 변명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죠.
자제나 인내를 하는 것은 계속 필요할 수 있는 것이죠. 자기 통제를 온전히 스스로의 책임하에서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죠. 완전하게 됨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혜택과 축복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쉽게 창조주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성서에 언급되어 있죠.
우선 마태 5장 48절에서는 우리가 완전해질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죠.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
그전 구절들에서는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죠. 여러 예를 들어서요. 결론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원수를 죽인다는 행동을 취하죠.
그러나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돈이 드는 것도, 육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어린이도, 노인도, 병자도, 가난한 사람도 다 할 수 있죠. 세상 교육에서 그런 사랑을 배우지 않아 못하고 있는 것이죠.
심히 불완전한 인간이라도 예수로부터 진리를 배운 사람들은 그렇게 하였죠. 물론 예수는 완전하였으므로 그분이 그렇게 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요.
이는 완전한 사람도 그 완전성을 상실하는 선택을 할 수 있고 불완전하게 된 사람도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는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완전하냐 불완전하냐가 그렇게 중요한 관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칙에 대한 순종이냐 아니냐, 사랑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지극히 불완전해도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은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불확정성이죠. 온전히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을 통해 사람은 지금도 창조주에 의해 사법적으로 의롭다고, 완전하다고 간주되거나 선언되어질 수 있으며 그 실효적인 결과는 당연히 따르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