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주와 이끼
나의 우주라뇨? 그야말로 기고만장이죠. 에고를 자기애라고 할 때 스스로 보기에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르키소스인 경우도 오직 물에 비친 자신의 자신의 외모에 도취되었다고 하는 것인데 지금은 인간이 퇴화 일로에 있어 그 외모마저도 사실상은 그렇게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원칙이 성서에 나오죠. (마태 22:39) 인간이 본능적으로 에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런데 창조의식이 없는 인간들은 자아라는 개념 자체가 올바르게 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도 제대로 하지 못함을 의미하죠.
겨울의 숲에는 침엽수뿐 아니라 푸르른 활엽수도 있습니다. 아롱다롱 눈송이들이 각 나무와 그 가지들과 잎 위에 얹혀져 있는데 햇빛을 받아 그 광택을 발할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이끼들은 거의 실용성이 없는 하찮은 식물로 여겨져 그걸 가꾸는 사람은 거의 없죠. 그러나 그 이끼들은 나무나 돌들을 신비스러운 푸른 빛깔로 장식하여 하늘, 구름, 봉우리, 눈 덮인 숲, 계곡의 물, 땅과 나무의 색과 어우러져 그 경탄할 아름다움을 장식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여를 하죠.
육안으로 보는 밤하늘과 망원경으로 보는 우주의 하늘, 모든 아름다움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장엄함에 대해서는 칸트도 별도로 논한 적이 있죠. 별들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에서 이끼의 신비스러운 색채에서 발산하는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 창조주의 그 예술적인 솜씨는 드높은 찬양을 절로 생기게 합니다.
그 우주를, 그 아름다움을,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기능들을 선물로 받았으니 나의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개미 한 마리가 죽어도 하나의 우주가 소멸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죠.
인간은 각자가 이 웅대한 우주와 만물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제각기 자신의 소유이죠.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을 값없이 언제나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누구의 소유함과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수백억의 사람이 같은 정도로 공유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누리는 자유와 행복이 조금도 제한을 받지 않죠.
숲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거닐 때 혼자 즐기기에는 아깝다고 느낍니까? 배우자와 함께 하면 당연히 그 행복은 배 이상이 됩니다. 그러다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료 부부를 만났다고 할 때 서로들 너무 반가워하고 기뻐하면서 함께 시간을 즐긴다고 할 때 그 행복은 더욱 커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나 만물뿐 아니라 서로를 소유하는 것이죠. 각자 서로를 소유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유는 서로 간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물을, 우주를 그리고 서로를 소유하는 것은 창조주에게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소유는 서로를 더 풍성하게,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죠.
진정한 자기애도 그런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