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9
언덕
(에피소드 9)
사실 빨간 벽돌의 주인집과 맞닿은 시멘트 셋집 건너편에는 관사가 모여 있었다.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일층짜리 관사들이 언덕을 기준으로 윗동네 아랫동네 나뉘어 있었다. 맨 아랫동네에 작은 놀이터가 있어서 그리로 자주 놀러 나갔다. 아랫동네 앞쪽엔 논이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경계에 철조망이 세워져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 철조망 아래로 구멍을 발견했는데, 그 구멍은 당시의 나처럼 조그만 아이가 몸을 수그리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논길이라도 길은 길이라, 그 구멍을 통과해서 질퍽질퍽한 흙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학교로 가는 큰길에 이르렀다. 물론 신발이랑 옷 여기저기 진흙이 묻고 난리 었지만.
겨울이 되면 슬레이트 지붕에 무거운 눈이 쌓이고 처마 끝에는 기다란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환경이 오염되지 않았기에 나는 고드름을 따다가 입 속에 넣어보기도 했다. 고드름에 혀가 달라붙을까, 조심하면서 길고 차가운 고드름을 마음껏 맛보았다. 그냥 맹물맛이었지만, 우리는 그게 재미있었다. 저마다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 중에서 가장 긴 것을 따다가 칼싸움도 하고, 눈을 뭉쳐서 눈싸움도 하고, 눈을 크게 굴려서 눈사람도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디선가 구해온 쌀포대나 비료포대를 가지고 언덕으로 향했다. 우리는 윗동네와 아랫동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존재하는지 몰랐지만, 윗동네와 아랫동네 사이에 걸친 언덕의 기울기만큼 눈썰매가 더욱 재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포슬포슬한 눈이 반들반들해질 때까지 우리는 포대를 타고 언덕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왔다가 다시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다시 미끄러져 내려오며 그 속도와 쾌감을 즐겼다. 우리는 추위와 열기에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사이에도 하얀 눈송이가 팔랑팔랑 내려왔다.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눈은 온 동네를 하얗게 덮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