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팩션(faction) 연애소설
달빛이 바다에 가장 아름답게 비친다는 새벽 1시. 아무도 없는 쓸쓸한 후포 백사장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그녀는 이제 없다.
"정진실 선생님, 전교조 가입하셔야죠?"
불쑥 교실문을 열고 들어온 안이영 선생님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어.. 엄.. 어버버..."
아 난 왜 이럴까? 하지만 바로 예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나는 전교조 가입 안 한 남선생님들은 남자로 안 보여요. 소심한 꼬락서니들 하고는.."
갑자기 남의 교실로 들어와서 대뜸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당신도 그다지 여자로 보이지 않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너무 예뻤다. 천사 같은 얼굴로 막말을 하는 그녀에게 나는 왠지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네! 그.. 그렇죠. 에이 소심한 인간들!"
어? 내가 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역시 진실 쌤은 이런 분일 줄 알았어! 그럼 가입하시는 거죠?"
"네, 지금 당장 가입하겠습니다!"
아, 나 지금 뭐하는 걸까? 엄마가 전교조 같은 거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엄마 미안.
늘 그렇듯 첫 모임의 식상한 자기소개와 인사들이 끝나고, 술이 몇 순배쯤 돌아 다들 취기가 오를 무렵. 나는 평소에 어딜 가나 들고 다니던 트럼펫을(폼 잡으려고) 꺼냈다.
"우와, 드디어 진실 쌤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건가요!"
"어머, 트럼펫 반짝반짝 멋지다! 저 실제로 처음 봐요!"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술이 취한데다 우쭐해진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과감해졌다.
"이 곡을 안이영 선생님께 바칩니다. 딸꾹!"
"꺄아~ 진실 쌤 왜 그래!"
그녀는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술이 취해서 그런 건지 얼굴이 복분자주 색깔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한껏 더 사랑스러워 보인 나는 마치 쳇 베이커가 접신이라도 된 듯 내 모든 것을 짜내어 마이 퍼니 밸런타인을 연주했다. 돌이켜 보건대 내 인생 최고의 연주였다.
"어머나, 너무 멋지다! 안이영 선생님 빨리 진실 샘의 마음을 받아줘요!"
"잘됐으면 좋겠다! 잘됐으면 좋겠다!"
다들 몰아가는 분위기로 한 마디씩 했다. 계속 몰아줘요!!
어느덧 시간은 흘러 새벽 한 시. 그녀를 데려다준다는 이유로 후포 앞바다 백사장을 걷게 되었다.
"진실 쌤, 제가 좋아요?"
엇, 아직 난 고백할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는데.
"네, 좋아, 아 아니 사랑합니다!!"
아, 준비가 되었구나.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인가요?"
그녀는 화끈했다. 왠지 나랑은 종족이 좀 다른 것 같았다.
"진실 쌤, 달빛이 가장 아름답게 바다에 비치는 시간이 언제인 줄 알아요?"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바로 지금이에요, 진실 쌤과 같이 있는 이 순간.... 이 아니라 새벽 한 시 바로 지금이에요. 하하하.."
그녀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농담이었지만 순간, 나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그날 새벽 뒷이야기는 생략...(왜 생략?!)
연인의 관계로 발전한 우리는 모든 갓 시작된 연인들이 그러하듯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여름방학이 되고, 각자의 고향으로 내려간 우리는 장거리 연애의 고달픔을 심각하게 느끼게 된다. 그녀의 고향은 경기도, 우리 집은 부산.
"오빠, 나 이번 주말엔 집회 참석해야 할거 같아서 오빠랑 만나기 힘들것 같아. 미안.."
"아니, 매일 보는 것도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 보는데 그때마다 이러면 어떡해!"
그녀는 집회란 집회는 혼자 다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처음 몇 번은 같이 참여도 했지만, 나랑은 영 맞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싫은 티를 냈더니 그게 싸움의 도화선이 되어 그 일로 그녀와 아직 서먹한 상태였다.
그런데 또 집회라니...
"미안, 이번 집회는 꼭 가야 해..."
"꼭 안 가도 되는 집회가 있었던가? 항상 그렇게 말하잖아!"
또 싸움이다. 좋게 말하면 될 것을 꼭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걸 어떡하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더니 오빠가 꼭 그 꼴이네!"
또 모를 소리를 한다. 싸울 때마다 그녀는 일부러 나를 화나게 하려고 어려운 말을 쓰는 것 같았다.
"지금도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해직당하고 재해로 죽어나가고 있는데, 모른 척 있겠단 말이야?"
"그래, 물론 알고는 있지만,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집회 나간다고 뭐가 달라져? 지금 내 인생도 힘든데!"
"그래, 그렇게 힘들어서 승진점수 따박따박 모으면서 교감, 교장 뒤꽁무니나 따라다녔던 거야?"
말이 좀 심하다. 이런 말 까지 들으면서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었다. 전화기 폴더를 빡 닫아버리고 벽에다가 집어던졌다. 평소에 내 행동들이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싸울 때면 매번 승진 이야기가 나왔다. 아니, 승진하는 게 뭐 나쁜 일인가? 왜 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평소 '승진'에 매우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었다.
전화가 계속 왔지만 받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집을 나섰다. 30년 가까이 살던 동네, 그만큼 추억이 많은 동네를 거닐다 보니 어느새 옛날 여자친구 집 앞에 서 있었다. 이런...
"현주야 술 한잔 하까?"
옛날 여자친구 집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녀는 집에 있었다.
"어, 오빠? 잠깐만, 지금 내려갈게."
최악이다. 전화기를 끄고 현주와 옛날이야기 들을 나눴다. 그녀와 나 둘 다 늦은 나이에 독서실에서 함께 교대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던 이야기, 나 혼자 교대 합격 후 그녀에게 소홀했던 이야기,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이야기, 물론 지금 여자친구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했다. 하지만, 현주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 이제 그만 전화기 켜고 전화받아."
뜨끔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미안, 현주야... 어.. 버버..."
"괜찮아, 나도 요즘 공부하느라 답답하던 차에 잘됐지 뭐,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도 하고 좋네 뭐."
이렇게 말하는 현주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이건 아니다. 더 이상 쓰레기가 되기는 싫어서 현주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나는 왜 이럴까?
잠시 후 현주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빠, 여자친구에게 잘해줘, 아마 오빠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이제 연락하지 말아줘."
땅속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창피하고 우울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담배를 물었다. 필터가 다 타버릴 때까지 들고만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다시는 현주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 여자친구인 그녀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난 참 소심하고 비겁한 사람인 것 같다.
갑자기 교실 문이 벌컥 열린다.
"우리 이야기 좀 해."
"오랜만에 만났으면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말하고 나서도 민망했다. 연락을 먼저 끊은 게 누군데 뻔뻔하게 이런 말이 잘도 나오는지..
"됐고, 우리 그만 헤어져."
어? 잠깐만.
"내가 왜 오빠를 좋아했는지 알아?"
그야 나의 멋진 트럼펫 연주와 잘생긴 외모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다가 그건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궁금해졌다. 왜 나 같은 소심하고 비겁한 인간을 좋아해줬을까?
"오빠는 기억 안 날지 모르지만, 난 아직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해. 오빠는 그날도 어김없이 만취상태였어."
어.. 뭐지.. 기억이 안 나... 뭔가... 불안했다.
"비 오는 밤이었어. 오빠는 술만 취하면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하면서 같이 백사장을 걸었지."
전혀 기억이 안 났다. 후포 앞바다 백사장을 걸은 건 전교조 분회 모임이 처음이 아니었던가? 땀이 났다.
"어, 그 그랬었지."
기억나는 척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내가 비 오는 날은 정말 싫다고 투덜거리니까 오빠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이렇게 말했어. 비가 온 후의 밤하늘에는 별이 맑고 아름답게 나타나잖아, 밝은 별을 보면 아마 비 오는 날도 좋아하게 될 거야.라고."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아, 이거 윤하의 '혜성' 가사잖아! 나라는 인간... 이런 걸 잘도 외워서 써먹었네.
"난 그런 오빠의 긍정적이고 순수한 마음이 좋았어."
그래 내가 좀 순수하긴 하지. 험험.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모든 게 다 변했으니까!"
"변하긴 뭐가 변했다고 그래! 난 아직 너를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말하고 나니 좀 부끄럽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아니, 난 오빠를 이제 사랑하지 않아. 오빠라는 사람을 너무 성급하게 판단했던 거 같아."
제발 이러지 마.. 앞으로 잘할게..
"언젠가부터 오빠는 점점 변해갔어. 처음에는 모든 걸 다 줄 것처럼 잘 해주더니, 시간이 갈수록 이때까지 만났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점점 내게 소홀해졌지. 물론 오빠는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어."
"잠깐, 옛날 남자친구 이야기는 지금 듣기 싫은데!"
"아니, 해야겠어. 특히 오빠 만나기 전 바로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이쯤 되면 막 나가자는 거지? 그래 어디 해봐!"
나는 옛날 남자친구 이야기에 매우 민감했다. 집착이 심했던 나는 어쩌면 그녀의 과거까지도 가지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옛날 남자친구 이야기에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 사람도 오빠같이 승진을 정말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어. 일부러 울진까지 내신을 써서 올 정도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니 상관있어. 오빠에게서 그 사람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됐다. 내가 그 사람과 닮았단 말인가?
"무슨 말이야? 좀 알아듣게 이야기해봐!"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된 건 작년 가을 이었어. 운동회 마치고 친목회를 했었는데 그때 당시 교감이 노래방에서 나를 끌어안고, 그만. 생각하기도 싫어. 어쨌든 그 모습을 남자친구라는 인간이 보고만 있는 거야. 화난 척하는 얼굴을 하고는.. 하지만 결국 내가 교감을 뿌리치고 나갈 때까지 아무 행동도 못하고 있었지."
어? 뭐 그런 녀석이 다 있지?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나 자신도 교감, 교장의 횡포를 눈감고 좋은 게 좋은 거야 라고 생각하며, '괜히 개기다가 찍 힐 짓은 하지 말자'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어쨌든 그 일로 크게 싸우고 바로 그 사람과 헤어졌지. 그 이후로 승진 주의자 들과는 말도 섞기 싫어졌어. 아무리 멋진 남자라도 남자로 보이지도 않았고."
좀 충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그녀에게 잘못한 일은 없는데..
"오빠도 마찬가지야. 신규인데도 흔쾌히 전교조 가입하는 모습을 보고 오빠는 뭔가 다르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사실 전교조는 가입만 하고 내가 가입했었는지도 잊고 있을 정도로 무관심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때까지 전교조가 뭐하는 모임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흥분한 상태인 나는 그런 일을 겪었던 그녀가 안타까웠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와서 승진하는걸 포기하라는 거야 뭐야?"
"승진을 포기해준다면 다시 만날 수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그날 나에게 이별을 말하러 온 게 아니라, 어쩌면 자신을 붙잡아 달라고 애원하러 왔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너무 어리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멍청이였기 때문에 그녀를 안아주지 못했다.
"아니, 내가 왜 승진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리고 난 그 정도의 쓰레기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어!"
"하아... 그래 알겠어.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해. 안녕. 잘 먹고 잘살아."
그녀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교실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학교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그녀는 형식적인 인사와 말들만을 건네고 나를 다시 예전처럼 대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관외 내신을 쓰고 후포를 떠나버렸다.
경찰에게 막혀 헌진중공업으로 진입을 실패한 시위대는 남포동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나도 전교조 소속으로 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람시의 진지전은 투쟁을 겁내는 개량 주의자들이 선택하는 비겁한 전술입니다 형님!"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게 된 나는, 어느새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집회라는 집회는 다 참여하는 강성 전교조가 되어 있었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내가 이렇게 변한 건 그녀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이렇게 집회에 참여하다 보면 우연히라도 그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 때문에 시작된 집회 참여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진심이 되고 있었다. 내가 모르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극단적 분노와 좌절감이 뒤섞인 약간은 왜곡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세계였지만 어느새 나도 그들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사표를 내고 어딘가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역시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생처음 길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시위대 대열 옆으로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 아래 흥청망청 젊음을 즐기고 있는 남녀들이 보인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불과 1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전혀 다른 두 세상이 충돌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 곳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의 기억도 여기 두고 가야겠지...
서랍 속을 정리하는데 그녀가 내게 써줬던 편지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읽고 불살라 버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맥주를 사 들고 그녀와의 추억이 있는 후포 백사장으로 나왔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빠, 내가 좋아하는 시야. 트로츠키의 유언장인데 오빠를 보면 왠지 이 시에 나오는 장면이 상상돼. 오빠의 긍정적이고 순수한 마음 같은 이 시를 소개하고 싶어서 한 번 써 봤어~ 사랑해~ 매일매일 보고 싶어!"
나는 밝은 녹색의 풀들, 맑고 푸른 하늘, 반짝이는 햇빛을 본다.
인생은 아름답다.
미래세대는 모든 악과 억압, 폭력을 씻어내고 아름다운 인생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새벽 한 시. 달빛이 바다에 가장 아름답게 비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