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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무늬영원 Sep 27. 2022

42화 흑토이 Ⅱ

- 순간 포기했는데 반전이 일어나다

벌써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키우던 식물, 선인장이 죽었다.

방 한 구석에 방치하다가 해를 넘겨 봄 청소를 하려고 구석구석 정리하다가 한동안 잊고 있던 그 선인장을 발견했지만 이미 골든타임은 놓쳐서 빼빼 말라비틀어진 앙상한 모습만 남은 상태였다. 그때 난 속으로 생각했다 ‘난 뭘 키우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라고. 물을 안 줘도 몇 달은 버틴다는 선인장을 앙상한 뼈대만 남긴 그 모습은 나에게 좀 충격이었다.     


그 후, 한동안 식물을 키울 여력도 관심도 없다가 이번 생일을 맞이하여 회사에서 다육이 ‘흑토이’를 선물로 받게 되어 오랜만에 식물을 키우게 되었다. (이전 글 <흑토이Ⅰ>에서 이미 설명한 듯하다.)    

 

처음 흑토이를 봤을 때 물을 한번 주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다육이는 한 달에 한번 물을 주면 충분하다고 하며 햇볕을 좋아한다고 해서 내 책상 앞에 놓인 것을 창가 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2~3일 지났을 때 보니 잎사귀가 시들시들해지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 되었다. 무지막지하게 비싼 것도 아니고 덩치가 큰 화분도 아니지만 뜻깊은 날에 받은 거라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다이소에 가서 영양제를 사와서 윗부분에 꽂아놓고 다음 날 확인하는데 영양제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 입구가 흙에 막혀있거나 돌 같은 게 있어 영양제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것 같아 약간 힘을 주었는데 그만 영양제가 순식간에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나는 손을 쳐다보았다. 영양제는 그 작은 화분 사이로 다 스며들었고, 이미 작은 화분 밑바닥은 그새 영양제 액체로 흥건하였다.     

 

퇴근 후 집에 가면서 맘이 썩 좋지 않았고 동시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흑토이를 확인해 보니 이파리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날 한 개를 떼어내고, 다음 날 두 개 떼어내고, 다섯 개째 잎을 떼어내다가 숫자 세는 것을 포기했다. 의미가 없다 싶었다.      


‘아, 한 달도 못 버티는구나.’ 내가 회사생활에 마음 둘 곳이 없어 흙토이를 키우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온 ‘반가운 손님’이 이렇게 빨리 내 곁을 떠날 줄은 나는 몰랐다.     

최후의 극약처방은 생각조차 못 했고 거의 죽어가는 모양새라 가더라도 마음 편하게 보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서 친구처럼 살갑게 대하며 조금씩 이별준비를 했다.

  


출근한 후 한숨 돌린 후     


“밤새 잘 지냈어. 춥지 않았지. 반갑다.”

“이따가 해가 나면 맘껏 쬐게 해줄게.”     


점심 먹은 후     


“아까 이쪽은 햇볕 많이 받았지. 이번에 이쪽으로 옮겨줄게.”

30도 가량 화분을 회전시킨다. 1시간마다 다시 바꿔준다.    

     

퇴근하기 10분 전     


“나 간다. 내일 보자.”

“잘 지내고 잘 자.”


볼 때마다 말을 건넬 때마다 잎사귀 하나 하나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2주가 지났나보다. 정성이 통했나. 

   

며칠 지나니까 흑토이에게 생기가 점점 도는 게 아닌가.

잎파리 자체에 힘이 생겼고 더이상 잎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위쪽으로 작은 이파리도 두어 개 자라기 시작했다.     

감격에 겨워 난 이렇게 속삭였다.


"기특하다.     

흑토이, 너도 힘내고 있었구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구나."     


1달도 못 갈 것 같았는데 이제 3개월째로 접어든다. 순간, 조선시대 안민영의 매화 시조가 떠오른다. 

아마 다른 분들도 기억이 날 유명한 연시조 중 제2수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리고 성긴 가지 너를 믿지 않았더니

눈 기약 능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었구나

촉 잡고 가까이 사랑할 때 암향조차 부동터라.    

 

나는 흥분되고 잠시 삘이 받아서 어줍짢은 패러디를 해 본다.  

 

약하고 마른 흑토이 너를 믿지 않았는데

하늘이 준 생명 잊지 않고 나에게 두세 잎 보여 주네 

작은 화분 두 눈에 담을 때 청명한 가을 햇볕 가슴에 불어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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