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古今)을 초월하는 어머니 마음
아침에 봄비가 내리는 마음이 신숭생숭해진다.
창고 속에 무작정 처박아 놓은 오래된 책들마냥 마음 속 깊은 속에
이리저리 대중없이 쌓아놓은 기억이 파편이 하나둘씩 스물스물 빗방울을 맞고 하늘로 떠오른다.
2002년도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한창 열리고 있는 때 나는 미국에 사는 큰누이를 보러 비행기 안에 있었다.
"스코어 1대 1. USA win. Korea win" 아직도 들뜬 기장의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한 일주일 간 보스턴 옆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에서 누이를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것이 누이와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니 우리 가족중에 살아생전 마지막에 만난 사람은 막내 나였다.
몇 년 후 큰누이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가족들이 상당히 고심하였다.
어머니는 당시 거의 말씀이 없으셨다.
훗날 어머니가 안 계시고 난 뒤 낡은 서랍 안에서 작은 앨범을 발견했다.
미국 생활 중에 찍은 몇 장의 사진들이 있었고, 그 밑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큰딸 OOO'이라 적혀 있었다.
날이 갈수록 흐려지는 기억을 붙잡고자 당신은 그렇게 나름대로 저항했던 것이다.
소식 모를 작은 누이 때도 그랬다.
내가 작은 누이 여고 앨범에서 '엄마, 이게 OO누나야'라고 며칠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흘낏 앨범을 보니 누이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작게 접혀 있었고, 나중에 다시 보니 사진 밑에 '작은딸 OOO'라고 적어 놓으셨다. 나는 누이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을 굳이 물으려 하지 않았고,
어머니 역시 은근슬쩍이라도 일언반구 내비치지도 않으셨다.
자식이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든 혹은 이승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기 힘들든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마음은 같을 것같다. 나이가 제법 먹은 지금 어렴풋이 그 마음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기도 하다 허난설헌의 곡자(哭子)라는 시에서 몇 해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哭子(곡자) 許蘭雪軒(허난설헌 1563~1589)
아들 죽음에 곡하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 테지.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키네.
- 『허난설헌 시집』, 허경진 옮김, 평민사, 2007년(개정증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