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야
피어나서는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으나 저무는 것을 알아채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봄이 싫었다. 화사한 순간이 어느 시간을 기점으로 가라앉는 기분을 견디기 힘들다.
유난스러운 봄이 가고 땀이 흐른다. 통닭이 아닌 통인을 만들 셈인지 나날이 뜨거워지는 날이 원망스럽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인 사람에겐 가혹한 나날이다. 꼼꼼히 씻고 머리를 손질해도 5분이면 전보다 추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씻지 않고 꾸미지 않았으면 억울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매일 열심히 씻고 꾸민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종로4가의 낡은 철물점을 인수해 만든 작업실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매듭짓다 보면 이제 대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잘 느껴졌다. 목재를 가공해서 원하는 구조를 만들고, 해야 할 일을 쳐내다 보면 이미 해는 저물어있다. 은지에게는 작업의 끝을 알리는 알림이 어둠이다. 사람들은 해가 지면 권리를 되찾는다. 직장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조용할 권리를, 그리고 그 조용할 의무를 은지에게 행사한다. 집에서는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그에게 향한다. 처음에는 터를 잘못 잡았다고 생각했다. 민원이 쌓이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밤까지 일해야만 채울 수 있는 의뢰들이 쌓여있었기에 선택지는 없었다. 마찰을 빚으며 일하기를 일 년. 은지는 병원의 어엿한 VIP로 거듭났다. 유난히 조용한 공방이 이상해 찾아온 이웃에게 쓰러진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병원 본원을 지나 옆에 조그맣게 위치한 장례식장의 고객이 될 수도 있었다. 병명은 과로 및 불면증, 신경증세로 인한 뇌졸중. 쉴 권리를 누리지 않은 죄로 쉬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건강의 문제가 생기면서 작업의 양상도 변했다. 이전처럼 무리한 수주를 받았다가는 곧장 할머니를 뵈러 갈 수도 있는데, 불효자라 하더라도 부모님보다 일찍, 그것도 과로로 세상을 떠나서는 면목이 없다. 작업 수주를 반으로 줄이고 여가 시간을 확보했을 때 그의 가족은 축제 분위기였다. 1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자식을 매달 보게 되었으나 그것이 뇌졸중으로 인한 일이라는 걸 생각할 때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음의 어머니는 종종 병세를 은인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는데, 아버지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씁쓸하기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품기도 했다. 용돈을 줄여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릴 때 걱정하지 말라며 주식계좌를 보여주었는데, 이후로 은지는 용돈을 받아야 할 입장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되었다. 안심은커녕 자신의 앞날이 더욱 걱정되기 시작했다.
종로 외진 곳, 세월이 식어 소리를 잃어버린 철물점들과 오래된 주택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정성 철물. 부동산 주인도 시큰둥하게 보여주던 곳이었지만 은지는 여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작업실을 차려보니 생각보다 더 좋았는데 위로 종묘가 있는 것도, 가볍게 남산을 다녀올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차가운 철물들과 다 낡아 내일이라도 재건축 딱지가 붙을 것 같은 주택가는 더 마음에 들었다. 밤이면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좋았고, 역에서 오는 길에 작은 술집에 단골 할아버지들이 앉아 조용히 한 잔 기울이시는 모습이 좋았다. 옆집의 9살짜리 꼬마가 심심하면 찾아와 작업을 구경하는 것도, 그 아이를 위해 사탕을 종류별로 사놓는 것도, 그 아이의 부모가 저녁쯤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는 걸 바라보며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도, 가끔 그들의 손에 치킨이나 피자가 들려있을 때 유난히 꼬마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게 좋았다. 소음을 싫어하던 앞집 노부부가 생명의 은인이 된 것도, 휴가를 다녀온 기간 동안 걱정이 되어 계속 이름을 불러봤다던 얘기를 들었던 것도, 단골 술집 할아버지들과 노부부가 싸웠던 얘기를 듣는 것도, 이제 작업하는 소리가 나지 않으면 적적해서 영 심심하다는 얘기를 듣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좋아하는 것들과 이별할 순간이다.
작업실의 계약 기간 2년. 유학을 위해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잠시 머물 곳으로 종로를 고른 것은 노인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었다. 많은 것을 흘려보낸 그들 사이에서 자신도 흘러갈 한 명의 사람으로 희미하게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인제야 은지는 모든 것이 자신의 오만이고 착각이었음을 인정했다. 노인은 많이 흘려보냈기에 더는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많은 아픔과 이별이 있었기에 더 큰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자기 형제를,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겹쳐 보았다. 그건 은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웃들을 마치 부모님과 형제, 친구처럼 대했다.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고된 날이면 술 한잔 걸치며 우스갯소리로 하루를 떨쳐냈다. 시간은 흐르지 못한 채 종로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다. 은지가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면, 어쩌면 영원히.
피어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첫 번째 봄이 저문다. 유난한 봄이 가고 날은 더워진다. 꼼꼼히 씻고 머리를 정리한다. 은지는 외출할 때마다 화사한 꽃무늬의 사탕을 하나씩 챙긴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