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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우 May 19. 2018

intro_아비가 씁니다

외톨이가 할 수 있는 일



1.

산부인과의 초음파실은 동굴처럼 깊고 어둡습니다. 

산과의가 아내의 복부에 젤을 바른 센서를 가져다 댑니다. 

침대에 누운 아내의 머리맡에 설치된 모니터에 생명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니터에 흐릿하게 떠오른 아기의 형상을 봅니다. 


아내의 배 위에 올려놓은 센서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부채꼴 모양의 아기 형상이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를 반복합니다. 

담당 산과의는 아기의 장기들을 하나하나 집어줍니다. 

다행히, 모든 게 정상입니다. 


아기는 아내의 자궁 내벽에 착상한, 좁쌀만 한 수정체였습니다. 

처음 본 아기는, 어릴 적 자연수업 시간에 젖은 솜 위에 올려놓고 관찰하던 강낭콩을 닮았습니다. 

달이 차고 기울면서 수정체는 점점 자라 사람의 형상으로 빚어집니다. 

열 번의 보름달이 뜨는 동안 머리가 생겨나고, 팔다리가 자라고, 오장육부가 자리를 잡습니다. 


나는 아직 우리에게 당도하지 않은 생명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엄지와 검지를 오므려 만든, 동그라미만 한 심장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힘차게 펌프질을 합니다. 

아기의 심박은 심해에서 들려오는 음파처럼 동그랗게 떨리며 빠르게 퍼져 나갑니다.

그 소리는 컴컴한 우주 저편에서 타전되어 

몇 백 광년의 어둠을 내달린 끝에 나에게 당도한 '존재의 신호' 같습니다. 


미지의 어둠 건너편에서 아기가 내게 말을 겁니다.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어요."


나는 이 기묘한 만남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2.

생명은 대관절 어디에서 생겨나 왜 우리에게 오는 걸까요?


철학적인 질문들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칩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나름대로 진지하게 이 질문에 대답하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렸습니다. 

한때는 종교에서 그 대답을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근원적인 질문의 대답을 알고 있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생명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또 종착역이 어디인지 인간은 감히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의 탄생에 가슴이 떨리지만, 

나는 위대한 철학자나 전능한 존재를 호출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남겨두면 됩니다. 

도달할 수 없는 질문의 대답을 찾아 헤매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면 됩니다. 


초음파로 찍은 아기의 입체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사람은 삶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한 채 이곳에 왔고, 

알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때가 되면 어딘가로 건너갈 것입니다.


나를 괴롭혔던 말들을 내려놓고 나는 '모름'을 담담히 인정합니다. 

이제 막 생겨난 생명과 눈을 맞추는 데 집중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대답 같은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기가 내게 말을 걸어온 이 첫 순간을 간직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그 무엇도 알지 못하지만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간직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너 정말 거기 있니?'


나는 초음파실의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목을 길게 늘어뜨립니다. 

숨을 죽이고 아기가 있으리라 여겨지는 곳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모니터에 떠오른 아기의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대면 따스한 감촉이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나는 만감이 교차합니다. 

기억에서 삭제된 먼 옛날의 만남이 나에게 우르르 몰려옵니다.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누나들이 보입니다. 

사진 속에서만 보았던 내 고향 부산의 셋방에 면 포대기에 싸인 내가 누워 있습니다. 

나는 조도가 낮은 전등이 달려 있던 그 방을 아버지의 사진에서 보았습니다. 

이제 막 생명을 얻은 내가 가족들과 눈을 맞춥니다. 


사진 속의 나는 태어나고 며칠을 살았던 걸까요?

내가 아기를 기다리듯이 그들도 나를 기다렸을까요?


시간이 자꾸만 거꾸로 흘러갑니다. 

어머니의 몸 안에서 

나도 한때는 이렇듯 약동하는 생명이었으리라 생각하니, 

문득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비단 나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무시무시한 불확실성을 이겨내고 이곳에 왔습니다. 


나는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3.

질투란 자신을 지우고 타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감정입니다. 

질투하는 자들은 비교합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흠모합니다. 

자신 안에 숨겨진 보석을 보지 못하고, 타인의 보석을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빛나는 보석은 영영 발굴되지 않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망하느라 헛되이 시간을 낭비합니다. 


질투에 빠진 사람은 결국 자신을 유실하게 됩니다. 

나는 주자를 일루에 묶어두려는 투수처럼 제법 질투를 잘 경계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나잖아. 나라도 나를 믿어줘야지. 내가 누구 편을 들겠어.'

속 편히 여기며 살아온 편입니다. 

무엇보다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아기 사이에서 나는 그만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립니다. 


아내는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내게 설명해주지만, 

나는 그게 대관절 어떤 느낌인지 좀체 실감할 수가 없습니다. 

어미와 아기 사이에는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나는 아내의 배에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댑니다. 


"아빠 목소리 들려? 

잘 있다가 나와. 

네 생일은 5월 17일/ 4월 12일이야. 

우리 그때 보자." 


나는 아내와 아기의 세계 밖에서 속삭이는 게 고작입니다. 


 


 


4.

아비는 임신과 출산의 영역에서 거의 전적으로 무용無用합니다. 

내가 한 일이라곤 씨를 뿌리고 탯줄을 자른 게 전부입니다. 

출산의 처음과 끝에 간신히 관여했을 뿐입니다. 

비밀스러운 일은 모두 어미의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아내와 아기는 내가 모르는 어떤 곳에서 둘만 따로 지냅니다. 

서로 알콩달콩 속닥이다가도 내가 다가가면 얼른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나는 아내와 아기 사이에 끼고 싶어 애를 태웁니다. 

나는 아내와 아기 곁에 있지만, 아내와 아기는 내 옆에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행성에, 아니 다른 차원의 세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만 따돌리고 자기들 끼리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대단히 불리한 입장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그만 외톨이가 되어버립니다. 






5.

나와 아기 사이에서 어떤 감정이 떠오르면 

나는 허겁지겁 메모를 합니다.

꾸물거릴 틈이 없습니다. 


문장들은 밤하늘에 피어난 불꽃처럼 짧게 명멸합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눈부심은 속절없이 사라질 것이 명백합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들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사이에 머문 그 눈부심을 붙잡아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록합니다. 

아내와 아기와 나 사이에 떠오른 문장들이 사라지기 전에 흔적을 남겨둡니다. 


이제 그 메모들이 제법 쌓여 있습니다. 

우리의 10년이 쌓여 있는 것입니다. 

나는 메모를 뒤적이며

기억의 갈피를 더듬으며

나를 물들였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복기하면서 

이 글을 써나갈 것입니다. 


아비가 씁니다. 

우리가 함께 한 최초의 나날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뚜루뚜뚜루뚜와 함께 한 지난 10년의 순간들을.


이게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외톨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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