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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우 May 20. 2018

1_아기는 어미이고,
어미는 아기입니다

이브의 누명



6.

토요일 늦은 오후.

비스듬히 기운 봄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옵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노는 소리가 먼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아련히 들려옵니다. 

열린 베란다 창으로 바람이 불어와 거실의 기다란 블라인드가 살며시 흔들립니다. 

나는 아내가 잠든 소파로 살금살금 다가갑니다. 

아내는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피곤해합니다. 

나는 잠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첫 아기가 아내의 깊은 곳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7.

아내는 새 생명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줍니다. 

호르몬의 분비가 달라지고 체형이 변합니다. 

아내의 신체적 변화를 지켜보노라면 마음이 아릿해집니다. 

거기엔 분명 동물성動物性  같은 것이 있습니다.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암컷만이 지닌 존엄 같은 것이, 

혹은 비극 같은 것이 또렷이 감지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아내는 어미가 되기 위해 그 존엄과 비극을 홀로 감당합니다. 






8.

창세기의 저자는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를 빌어 태어났다고 썼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임신과 출산에 관한 한 나만큼이나 무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뭔가 대단한 걸 빚지고 있다는 인상을 심으려 했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교묘하게 선언한 겁니다. 


명백히 남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창세기의 저자는,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성우월의 가치를 투영한 혐의가 짙습니다. 

'갈비뼈를 내주었다'는 문장을 한 단어로 바꾼다면, 

그것은 '출산'입니다.


그의 말처럼 아담의 갈비뼈가 그토록 대단한 거라면 

어째서 한 생명의 탄생에 아비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은 이토록 없는 걸까요?

이건 도무지 앞뒤 맥락이 맞지 않습니다. 





9.

대관절 내 젖꼭지의 쓸모는 무엇일까요?

먼 옛날엔 남자도 젖을 물렸던 걸까요?






10.

생명을 잉태했다는 희열과, 

자신의 육체가 그 도구로 쓰였다는, 

처절한 동물성 사이를, 

아내는 번갈아 오갑니다. 


입덧과

젖몸살과

산고와 

오로惡露 까지.


수컷인 나에겐 차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설명한다 해도 하나도 실감하지 못할, 

난생처음 겪는 육체적, 심리적 변화를 홀로 감내합니다. 






11.

신은 아담보다 이브를 먼저 창조했고, 

이브의 갈비뼈에서 아담을 창조했다고 보는 게 여러 모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그걸 아담에게 가져와 먹였다는 기록은 치사하기까지 합니다. 

남성우월의 가치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이건 명백히 이브에게 누명을 씌우는 행위입니다. 

가져다 준다고 무책임하게 먹는 건 대체 뭡니까. 

어떻게 임신과 출산의 대업을 부여받은 이브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겠습니까.

이건 누가 봐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젖꼭지를 가진 아담에게나 어울릴 법한 일입니다. 






12.

아기는 어미이고, 어미는 아기입니다. 

어디서부터가 어미이고, 어디서부터가 아기인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와 아기는 경계가 모호한 상태로 공존합니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내가 아내를 안으면 아기를 안는 게 되고, 

내가 태중胎中의 아기를 쓰다듬으면 아내를 어루만지는 게 됩니다. 


아내는 통로입니다. 

둘은 서로 통합니다. 

엄마가 웃으면 아기도 웃고, 엄마가 울면 아기도 웁니다. 

엄마의 감정은 아기의 감정이 됩니다. 


아내는 홀로 길을 걸을 때면 아기에게 말을 건다고 합니다. 

나는 한 번도 그 광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혼잣말이지만, 아내는 엄연히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거리의 온갖 소음을 뚫고 어미의 목소리가 아기를 향해 흘러나옵니다. 

어미의 고막을 빌려 소리를 듣던 아기가 어미의 목소리에 반응합니다. 

어미의 나직한 음성이 양수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킵니다. 

잔뜩 옴츠린 아기의 몸에 어미의 음성이 물결로 가닿습니다. 


어미는 이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 먼저 아기를 살아 있는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13.

아내가 이브의 몫을 충실히 감당하는 동안, 나는 하릴없이 빈둥거립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빈둥거리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빈둥거리기만 해도 되는 걸까? 

자꾸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기도를 합니다. 

기도라도,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울러 남편의 이름으로

이브의 누명이 벗겨지기를 간곡히 빕니다.

아멘."






14.

언제 잠에서 깼는지 아내가 나를 보고 있습니다. 

나는 아내의 배에 가져다 댄 얼굴을 얼른 치켜듭니다. 


"뭐해?"

아내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봅니다. 


"하긴 뭘 해."

나는 시치미를 뗍니다. 


"뭐 하고 있었냐니까."

아내의 눈매가 가늘어집니다. 


"아냐. 아무것도."

나는 아내의 시선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아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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