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불리어질 때에 한 사람은 비로소 거기에 있게 됩니다.
45.
출산예정일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나와 아내에게는 숙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집안의 어른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관습이라지만,
나는 그 누구에게도 작명의 특권을 양도하지 않습니다.
장인어른은 고향에 오랫동안 작명을 해온 어르신이 있다고 슬쩍 내게 귀띔을 합니다.
하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내 아기의 이름은 아비인 내가 직접 지어주고 싶습니다.
46.
아이의 이름은,
나와 아내가,
아비와 어미로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상징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를 굳이 빌리지 않아도 이름이란 곧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름이 불리어졌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로 가서 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한 사람의 이름이 불리어질 때에
한 사람은 비로소 거기 있게 됩니다.
아기가 아내와 하나였을 때,
아내와 내가 태명을 지어주었던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축복이'와 '새봄이'로 아기를 불러주었기 때문에,
아기들은 더욱 생생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이름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의 이름을 지어야 합니다.
47.
전통적인 작명법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따릅니다.
오행은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원소입니다.
불과 물, 나무와 쇠, 흙이 그것들입니다.
아기가 태어난 연월일과 시간으로 사주를 보면
이 오행 중에 부족한 기운이 무엇인지,
지나치게 과한 기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족한 오행의 기운은 보충하고, 과한 기운은 덜어내어야 합니다.
한자의 부수에 이 우주를 구성하는 오행이 쓰입니다.
물의 기운이 모자라면 물 수 자가 부수로 들어간 한자를 써서 물의 기운을 보충해주고,
물의 기운이 과하면 물과 상극인 불 화 자가 부수로 들어간 한자를 써서 이름을 지어주는 식입니다.
나는 이름이 의미가 아니라 오행에 의해 정해진다는 사실에 놀랐고,
획수까지 따진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아내와 나는 한자에 연연하지 말고 어감에 집중하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작명에도 유행이 있어서 주로 사용되는 음운이 있는데, 그런 음운들은 피하기로 합니다.
너무 흔한 이름도, 지나치게 파격적인 음운도 배제하기로 합니다.
혹여 이름으로 놀림을 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음운들을 조합합니다.
이름이 입에 붙을 때까지 소리 내어 말해봅니다.
그리하여 아기의 이름이 완성됩니다.
허나 아이들의 이름은 이 책에서는 공개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아이의 사생활도 소중하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써 가면서 이름을 언급해야 할 때도 있을 테니,
대신 가명을 하나 지어줄까 합니다.
첫째는 큰 뚜루뚜,
둘째는 작은 뚜루뚜.
합하면, 뚜루뚜뚜루뚜.
48.
큰 뚜루뚜와 작은 뚜루뚜에게 각각의 가명을 말해주었더니 마음에 안 든다고 난리를 칩니다.
큰 뚜루뚜는 실명을 밝혀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나중엔 싫을지도 몰라."
내가 말합니다.
"상관없다니까."
큰 뚜루뚜까 말합니다.
"아빠가 널 존중해서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말했더니,
“내가 좋다는데, 왜 아빠가 정해!” 하고 따박따박 말대답을 합니다.
작은 뚜루뚜는 가족끼리 편을 나눠 2대 2 축구경기를 했는데,
골키퍼를 잘 보길래, “와, 완전히 거미손인데.” 하고 말한 걸 기억하고는,
자신은 ‘거미손’이라고 해달라고 합니다.
거미손이라니.
스파이더맨도 아니고.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립니까.
어쨌든 두 아들은 아비의 작명에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은 다행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글은 내가 쓰는 거니까.
상관없습니다.
뚜루뚜뚜루뚜,
뚜루뚜뚜루뚜.
부를수록
정겹고 흥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