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난데없이 아버지가 됩니다.
49.
아내는 아기를 재우다 함께 잠이 듭니다.
아기 하나를 챙기는데 이렇게나 손이 많이 가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넷이나 키워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침대에 모로 누운 아내의 품 안에서 잠든 아기를 봅니다.
어쩐지 아기는 아직도 어미의 안에 머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아내와 아기는 여전히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뷰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아내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습니다.
셔터를 누르다 말고 나는 카메라를 내립니다.
아기는 어미의 가슴에 묻혀 얕은 숨을 내쉽니다.
나는 아내와 아기를 번갈아 바라봅니다.
50.
이상한 일입니다.
아내는 출산과 동시에 어미가 됩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일말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아기와 무엇을 하든 익숙하게 해오던 일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후 나는 아내가 문득문득 낯설게 느껴집니다.
내가 사랑한 여자는 어디론가 홀연히 증발하고,
아내와 무척 닮았지만,
실은 아내가 아닌,
어떤 여자가 나타나,
아내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틀림없이 아내인데도,
종종 이런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정말 이 여자가 내 아내일까요?
정말 이 아기가 내 아기일까요?
가당치 않은 의심이 자꾸만 내 안에서 고개를 치켜들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트루먼 쇼’의 짐 캐리가 된 것만 같습니다.
모두가 짜고서 나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져듭니다.
아기를 향한 강한 끌림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에 시달립니다.
이 모든 게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만 같습니다.
51.
아내를 찾아온 어머니와 이모가 “이을이가 이제 아빠가 됐네.” 감회에 젖어 말합니다.
나는 어쩐지 그 이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맞아, 내가 아빠가 되었지.’
어머니와 이모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가 처한 현실을 깨닫습니다.
아내와는 달리 나는 어떤 점에서는 아직 아비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훨씬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아내처럼 출산과 동시에 아비가 되지 못했던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미와 아비의 차이에서 생겨났습니다.
어미에게는 10개월의 공존 기간이 있었습니다.
달이 열 번 차오르고 기우는 동안 아내는 서서히 어미가 되어갔던 겁니다.
하지만 아비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런 공존 기간이 없습니다.
아비의 입장에서는, 대기권을 뚫고 돌연히 나타난 유성처럼 아기가 태어납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난데없이 아버지가 됩니다.
아비가 아비가 되는 방식은,
어미가 어미가 되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아비는 뒤늦게 아비가 됩니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없지만,
아비는 뒤늦게 아비가 되는 어떤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가가지 않는다면 그런 순간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공연한 소리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