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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shim May 10. 2024

까마귀도 가족애를 보이네요

(5월에 마주친 미물의 가족사랑)

 

하등동물도 우리처럼 가족애를 가졌다


5월 좋은 계절은 가족 간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다양한 행사가 만들어진다. 우연히 조금 이례적인 상황을 보고 다시 가족 간의 사랑을 떠오르게 되었다. 사람사이의 사랑이 아닌 미물의 세계에서 가족애를 본 것이다.


어제 여의도의 복잡한 왕복 4차선 도로를 주행하고 있었다.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중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낮은 위치에서 차량 보닛 근처를 낮게 비행하고 있었다. 이 조류는 날더라도 조금 높은 위치에서 나는데 금번 비행패턴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그러다가 결정적 장면을 보게 되었다. 나의 차로 옆길에 마주 오던 길에 납작 눌려 죽은 한 마리의 까마귀를 보았다. 아마도 조금 전에 차량에 치어 죽고 무거운 차량 무게에 납작하게 눌린 오징어 같은 상태였다. 그의 곁에 살아있는 다른 한 마리의 까마귀가 차가 달리는 도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납작해진 그의 사체를 입으로 끌고 조금씩 움직이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모두가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크락션을 울지지 않았다. 나도 창을 열고 이 광경을 주목하게 되었다. 마주 오던 차량 또한 이 광경에 감히 차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정차를 하였다. 강아지가 그런 사례는 있었지만 조류 때문에 차를 정차시키는 일은 아주 희귀한 사례라 여겨진다. 까마귀가 도로 한 복판에서 죽은 까마귀의 시체를 끌고 가는 행위를 인간 운전자가 동감하는 광경이었다. 나는 가슴속이 멍해오기 시작했다. 아니 난생처음 보는 한 까마귀의 행위는 정말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었다. 마치 인간의 교통사고 현장을 볼 때의 마음과 같았다. 애처로웠다.


나는 반대쪽 차선이라 마냥 넋 놓고 이것을 계속 볼 수는 없어 잠시 후 차량 진행을 했다.

차를 운전하면서 생각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죽은 까마귀가 그의 동료인지 가족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나의 생각으로서는 분명 가족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인간도 가끔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가족을 위해 스스로의 몸을 던지는 상황을 들어서 알고 있다. 까마귀도 우리 인간이 느끼는 동일한 가족애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동물들은 인간과 달리 스스로 위험을 잘 회피하는 본능이 있다고들 한다.


그런 까마귀 종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리는 차 앞에서 보인 행위는 어쩌면 사람보다 가족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동물의 본능으로 여겨진다. 흔히 새들의 지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간에 비해 아주 열등한 동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미물이지만 그들 세계에는 분명 정해진 사회규범도 있을 것이며 종의 유지를 위한 관계질서가 있을 터이다.




source, unsplash


그래서 까마귀에 대한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다. 조류 중에도 까마귀는 타 동물보다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그중 똘똘한 짐승과에 속하는 조류라는 말이다. 까마귀는 타 군집 동물 중에서 가장 사회적인 동물로 그들 각자의 감정을 소유하고 이를 표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사람처럼 가족 구성원과의 상호작용, 파트너 선택, 새끼를 보호하는 행동 등을 하며 집단과 소속에 연관된 감정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온 김에 조금 다른 조류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내가 비둘기와의 대치를 했던 경험이다. 수년 전 아파트의 베란다 쪽에 비둘기가 날아와 계속 둥지를 치려고 했다. 비둘기의 둥지를 튼다는 것은 위생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방치하면 새의 깃털과 둥지를 만드는 나뭇가지 같은 물질을 물어다 그들만의 집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먼저 새의 똥을 그대로 방치함을 참아야 하는 것이다. 새똥은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벌레 유충이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둥지를 허용 않는 나와 비둘기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벽돌등을 놓고 이들의 둥지를 못 짓게 방해하는 나의 노력은 그들을 이기지 못했다. 치워 놓으면 밤사이에 어느새 목재가지를 물어다 둥지를 거의 반 정도 만들어 놓기까지 하였다. 냄새로 조류를 퇴치하는 방법 등 가능한 여러 조치를 했지만 별효과였다. 최후로 노출된 베란다 전체에 망을 씌우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이제 이겼다고 자만을 가졌다. 근데 아직 즐거워할 단계가 아니었다. 이들은 혼나 보라는 듯이 철망 위에다 그들의 분비물을 계속 쏟고 갔다. 추가적 퇴치 구조물이 더 필요했다.


뾰쪽한 철사를 꼽아두는 구조물을 해 둔 이후에 그들은 전부 퇴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베란다에 이 철사망은 유지된 체 있다. 모습은 조금 유치하지만 더 이상 비둘기는 안착하지 못했다. 그때 느낀 생각은 이러했다. 우선 미안했다.


미물이라고 생각하는 조류도 최소한의 생존 본능과 가족사랑은 오히려 사람보다 더 영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났다고 뻐기는 인류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강한 짐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더 강한 생존 본능과 가족애를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아, 잘 났다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뻐기지 말자. 다 같은 짐승들이다. 사람도 미물도 같다. 같이 이 지구상에 계속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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