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성찰)
청각이 안 좋으니 유익한 강의를 들어도 다 이해를 못 한다. 그래서 강의 자리를 잡을 때 스피커가 놓인 곳 근처에 자리를 잡으려 한다.
나에게 다른 유명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게이트가 2개가 있다. 말과 글이다. 그중 청각을 통해 듣는 과정이 훨씬 이해력이 크다. 근데 화자의 설파 내용을 내가 전부 다 잘 들어야 하는 점이 이해력의 관건이다. 글은 이와는 다르다. 소설을 보면 의미 있는 구절을 몇 번 다시 읽으면 되는 편익이 있다. 그럼 귀로 듣는 강의는 흐르는 물과 같아 완전한 이해가 안 된 체 지나치니 이것은 손해 보는 장사일까.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점도 있다
그가 들려주는 말 가운데 하나를 잡아서 내 마음대로 상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강사가 하는 대화 중에 어떤 특정의 구절만 깊이 사유하는 자유가 있다. 어쩠던 이것만 해도 큰 이득 아닌가
며칠 전 특강이 있었다. 성당에서 자주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다. 주로 외부에서 오신 사제나 사계의 전문가 분들이다. 그분들은 그 분야 최고의 수준 있는 분들이다.
이번에도 나는 그분이 펼치는 마법의 양탄자 한쪽 귀퉁이 자락에 올라탄 느낌이다. 그가 말하는 견해와 주장을 다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부는 내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 때로 사람들이 모두 유쾌하게 웃기도 하지만 나는 정확히 그들이 웃는 이유를 모르고 덩달아 미소만 짓는다.
그분이 말하는 중에 기억이 오래 남는 것이 있었다. 바로 깊은 물의 비유이다. 물컵에 있는 물을 마시며 비유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기 이 컵에 소금을 확 넣으면 엄청 짜겠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깊은 바다에 소금을 넣으면 바다가 더 짜질까요” 하는 비유였다. 그리고 다른 사례를 더 추가하셨다. 다른 사람들의 쓸데없는 참견과 비평을 당했던 일을 말했다. 이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순간적으로 화가 나는 법 이란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주위의 비평에 초연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깊은 물의 비유에 근접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소위 말하는 대인의 경지에 이른 것 이란다. 대체로 그분의 말씀은 깊은 성찰과 인생의 지혜가 담긴 가르침이라 여겨졌다. 일단 하나의 주제가 나에게 던져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 그 주제에 나의 상상력을 가동한다.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혼자서 부끄러워졌다. 나는 대체로 7,8부 능선까지는 잘 참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비등점이 조금 더 높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사람마다 끓는 온도가 상이하다.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끓었던 증기력이 기어이 분출된다. 일단 분출되면 상대방과의 관계는 겨울로 들어선다. 시간이 지나고 후회하지만 지나간 KTX 같이 저 멀리 떠나갔다. 가끔 그 순간을 잘 참을 때도 있다. 이때는 스스로 “오늘 아주 잘 참았다. 아주 잘한 일을 했구나” 하고 대견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런 수확은 해마다 이어지지 않았다.
깊은 물을 생각해 본다.
반응하는 속도와 깊이와의 관계에 따라 차이가 만들어진다. 작은 정원에 있는 물은 아이가 던진 조그만 돌멩이 하나에 크게 반향을 일으킨다. 바다는 비록 파도가 치고 거칠게 보이기도 하지만 파도 아래에는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다. 수십만 톤의 거대 선박이 물속으로 들어와도 아무 반응이 없다.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즉각적으로 흔들리지 않음을 상징하는 거인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화를 내고 당황하고 작은 것에 조바심을 내는 것은 우리 내면의 깊이가 부족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닐까. 성숙한 마음은 충격을 이겨내는 완충력이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내부적으로 반응을 품에 안는 간격을 두는 것이다. 사람의 성숙도는 내면의 깊이를 증거 하는 척도라 본다. 강의를 해 주신 사제가 침잠(沈潛)이라는 말을 썼는데 ‘물속 깊이 내려앉은 상태’를 가장 적절히 표현한 것으로 본다.
증기의 힘은 산업혁명을 일으켜 인류에게 커다란 공헌을 했다. 증기는 그 놀라운 폭발력을 가져 산업 부분 발전에 엄청난 이바지를 한 것이다. 산업에 공헌한 거기까지가 성공이었다. 사람의 내면에서는 이런 증기와 같은 폭발력은 해악의 요소로 간주된다. 증기와 같이 폭발력을 가진 분노와 화는 감정을 통제하기 불가한 상태에서 분출된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힘은 증기와 같은 폭발력에서 오지 않고, 바다처럼 깊고 평정한 상태에서 나온다고 여겨진다. 감정적으로 본 증기의 내면은 문제의 본질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반대로 깊은 물의 상태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 감정을 주관하는 주관자에 오르는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나에 대한 성찰적 질문을 해 본다. 내가 습관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증기 같아야 하나, 또는 깊은 물처럼 되어야 할까. 답이 필요 없는 바보 같은 질문이다. 이제부터 훈련을 시도해 봐야 할 듯하다. 사소한 일에 대한 반응을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아침에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에 서있는 자동차를 보고 한마디 할까 생각했지만 잘 참은 것 또한 작은 실천의 시작이다.
참여한 회의에서 의도적으로 말을 참아보려고 한다. 나 없어도 세상은 더 잘 돌아간다는 침잠의 상태를 유지해 보려 한다. 대인다운 완벽을 찾자는 것이 아니라 깊은 물 같은 침잠의 상태로 근접해 보고자 한다.
들은 옛말이 있다. 물은 흐르는 법을 알기에 바다에 이르고, 사람은 묻는 법을 알기에 깊이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