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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활 비교, 그때와 지금

(과거는 지나서 즐거운가)

by evan shim


문득 떠오르는 과거를 보고, 현재 생활경제와 비교 –


아침에 집사람이 바지를 수선하고 있었다. 바늘로 아마도 바지의 허리 사이즈를 줄이고 있는 듯했다. 스르륵 어릴 적 과거가 떠 올랐다. 과거는 원래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서 야릇한 향수가 있다. 어렵게 살았던 생활경제 이야기다. 년도로 말하면 1960년대부터 지나온 시절이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때 우리 집은 총포사를 하여 흔히 말하는 궁핍과는 거리가 먼 상태이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 상급 이상의 생활 정도로 보였다.


아버님은 다소간 고급 취미를 즐기실 무렵이다. 어느 정도 돈도 있었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얼리 어답터 취향을 즐기신 것이었다, 아버님은 당시로서는 맞지 않은 특수 취미를 즐기시고 있었다. 8미리 영화를 집에서 볼 수 있었고 비디오와 오토바이 그리고 RC로 조정하는 모형 항공기를 즐기는 수준이었다. 시골인 순천에서 처음으로 파라보라 TV 위성안테나도 떡 지붕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행복한 이야기이다.


힘들었던 이야기도 해야 재미가 날듯하다. 가업인 총포사는 두세 명의 직원을 고용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직원들과 우리 가족의 점심은 의례 고구마로 때웠다. 고구마만 먹으면 목이 마르니까 여기에 싱건지라는 국물과 함께 먹었다. ‘싱거운 김치’라는 말에서 유래한 짜지 않은 김칫국이다. 요즘으로 치면 백색의 동치미 국물 같은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그리 먹는 것이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점심 식사는 이런 식으로 해결을 한 것이다. 보통의 중류 가정에서 통상적으로 일용할 양식은 그리 상용되어졌다. 그러면 그리 열심히 먹었던 많은 고구마는 어디에 보관을 했을까. 방에 한편에 보관했다. 주식으로 먹는 식량의 창고이다. 시골에서는 작은 방의 한편에 볕 집단으로 수직 벽을 만들어 세우고 그 내부에 가득 고구마를 챙겨 놓았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 가면 의례 그곳과 친척들 집 모두에 이런 공간이 되어 있었다. 고구마는 생으로도 또 삶아서 먹을 수 있다. 그 외에도 말려서 ‘빼깽이’라는 건조식품이 되기도 한다. 혹시나 해서 ‘빼깽이’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검색했더니 전남지역에서 고구마 등을 얇게 잘라서 말린다 하여 말랭이의 방언이라 나와 반가웠다.




고구마.jpg 우리를 먹여 살렸던 고마운 고구마, unsplash


당시의 점심 식사 정도가 이럴 상황이니 그럼 저녁은 어찌했을까. 저녁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녁에는 고구마가 아닌 정식으로 지어진 밥을 먹었다. 물론 보리와 함께 섞인 밥이다. 우리 집은 직원 두 사람이 저녁에도 야간작업을 했다. 주로 동계절에 국한되었다. 총포사는 겨울 한철이 최고의 성수기이다. 저녁 작업을 하는 이유는 엽총탄을 장탄하는 것이다. 재생탄을 저녁 내내 제작해 두어야 다음날 판매가 되는 구조였다. 이 재생탄 장탄 작업은 거의 밤 11시경까지 계속이 된다.


그리고 작업이 완료되면 간식을 먹는다. 간식은 김칫국에 밥을 넣고 만든 국밥과 유사한 간식을 어머님께서 만들어 주셨다. 작업장을 정리하고 다들 심야 간식을 먹었다.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모두들 정신없이 먹었던 추억이 새롭다

이 일은 내가 중학생 시절서부터 계속해온 작업이다. 비록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지만 장남으로서 가업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당연히 공부는 나하고 절연 상태에 머물렀다.


그 시절 추억의 다른 토막이 좀 더 아스라이 생각난다. 나는 다니던 중학교는 제법 높은 산기슭에 있었다. 그런데 산기슭에 위치한 덕분에 주위에 고구마 경작지가 제법 많이 있었다. 학교는 외부와 절연된 울타리가 없었다. 그러니 점심시간에는 마음대로 산을 다니며 고구마를 캐 먹을 수 있었다. 불법이지만. 이때 호주머니 필수품은 주머니 칼이었다. 고구마를 야생 도야지처럼 씹어 먹을 수는 없으니 칼로 깎아 먹어야 했다.


당시는 음식 외에도 모든 것이 풍족하지 못한 시기였다. 의류도 간신히 추위를 모면할 수준에 머물렀다. 그때 교복 바지에 대한 생각이 난다. 보통 학생들은 학교 근처에서 교복을 구입해서 입었을 때이다. 나는 어쩌다 군인들이 입는 군복 사지천을 염색하여 만든 바지를 맞추어 입었다. 당시로서는 큰 사치였다. 바지의 주름이 반듯이 서 있었고 무엇보다도 겨울 추위에 아주 따뜻한 옷으로 인정을 받았던 옷이다.


당시에는 오래된 옷은 바깥천이 닳아지면 안과 밖을 뒤집어서 다시 옷을 만들었다. 그러면 거의 새것 같은 옷으로 재탄생된다. 그때는 세탁소에서도 대부분 의류수선을 해 주었다. 이 작업을 ‘우라까이’라는 일본어로 통용되었다. 뒤집는다는 말이다.


양말도 발 앞부위에 구멍이 생기면 당연히 꿰매어서 신었다. 구멍이 나면 어머니가 그때마다 바늘로 꿰매는데 어떤 때는 양말 속에 둥근 전기등(다마)을 넣고 바느질을 한 것도 생각난다. 또한 대부분의 집에는 재봉틀이 있는데 혼인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시절이다. 안암동에서 대학시절 하숙집 아주머니께서 양말을 세탁해 주셨다. 그런데 구멍이 나면 다른 친구의 양말을 먼저 신고 학교에 가는 얌체도 있었다. 나도 나중에는 그 물결에 합류했지만.


이제 그때를 회고해 보니 전혀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나를 비롯한 당시의 친구들은 그 시절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보냈다. 그러나 지금의 환경은 그때와는 너무나 극적일 상태로 많이 변했다. 풍요의 세대에 접어들었다. 가장 중요한 의(衣)와 식(食)의 궁핍은 많이 사라졌다. 대신 다른 고민의 문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세대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고 항변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비교의 대상이 최소 억대 이상의 연봉자 들과 비교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와 같은 나이 든 세대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지 생활의 어려움이 다시 온다 해도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더 힘든 시절을 당해 보았기 때문이다.


PS. 80년대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든 가방 손잡이는 그의 부인이 꿰매어 주었다 했다. 내가 승무원 시절 그 현물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니 진실이다. 그때는 세상이 다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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