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보다 우리를 더 성장시키는 힘)
원래 나는 좀처럼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셨을 때도 크게 애통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세월이 지나고 문득문득 그분들과의 연결고리가 떠 오를 때 눈물이 났다. 원래 감정을 가진 활동체가 어떤 대상물을 두고 특유의 느낌을 겪는 이유는 아마도 수십 가지가 될성싶다. 쉽게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아이가 눈물을 보인다면 그가 우는 이유는 다양한 스펙트럼 속의 하나의 신호에 의해서 이다. 모두가 같은 이유로 울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할 듯하다.
이제 나는 제법 나이가 들었다. 눈물이 메말라 있는 상태로 본다. 생의 주위에서 발생하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부닥친 상황이 애처로울 따름이고 해당자를 위해 안식의 기도를 드리는 정도였다.
그런 내가 다른 예외가 있다.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슬픔에는 현실세계와 전혀 달리 슬픔을 느끼고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로 책을 통해서이다. 가끔 영상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책이란 독서자가 느끼는 바 대로 스스로의 감정곡선이 만들어진다. 몇 군데 책에서 눈이 핑하고 물을 머금는 현상이 있었다. 초기에는 의례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하나가 둘이 되고 계속 이어졌다. 어, 이게 무언가 작동하는 건가 하고 의심을 하게 되었다. 원인 제공은 아마 두 가지 일 듯하다.
하나는 저자가 독서자의 감정곡선을 민감하게 건드리는 능력이 있는 경우이다. 한 마디로 삼단논법 식으로 눈물이 절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애절한 감정선에 연결하는 회로에 ON이 되어야 하는데 감정 이입은 사람마다 다르게 이루어져서 모두를 노릴 수는 없다. 어쩠던 위대한 작가들은 이 점에서 특출성을 발휘하는 것 같다. 단 필요한 부분에서만 그렇다는 말이다. Not always이다.
그럼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 작가가 주는 감정 유입은 외부적인데 반해 내가 스스로 느끼는 감정선의 눈물 회로는 극히 내부적인 것이다. 사람에 따라 감정 회로가 슬픔에 민감하게 작동되는 경우가 있다. 주로 여성이나 아이들이 이 부류에 많을 듯이 보인다. 나는 나이가 들고 나서 감정을 느끼는 회로의 굵기가 점점 얇아진 것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젊은 시절의 나는 거의 슬픔과는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처럼 그리 자주 만나는 관계를 맺은 일이 없었다.
어떤 국내대학 의학팀의 연구에 의하면 60세 이상의 사람들은 오히려 슬픔, 기쁨, 공포나 혐오등의 감정이 무디어진다고 했다. 이것도 일종의 노화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어쩜 나는 통계와 반대의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자 그럼 어디에서 내가 눈에 물이 맺히는 반응이 일어났는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 한다. 여러 장면이 떠 오른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떠 오르는 책이 3권 연상되었다. 내가 보고 느낀 슬픈 정서일 따름이다. 다른 분들은 어쩌면 다른 이야기를 추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가 먼저 생각났다. 막내 알료샤에게 죽은 아들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어느 날 저녁에 그 아이의 침상 곁에 앉았는데 어린 아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말했다. “아빠, 내 무덤에 흙을 뿌릴 때 빵 껍질을 부수어서 뿌려주세요. 그럼 참새들이 날아올 테니까요. 참새들이 내 무덤 위에 와서 재잘거리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즐거워할 거예요”. 두꺼운 책을 보던 중 가슴 뭉클한 공감이 이어지는 순간이다. 위대한 문호가 독자의 가슴을 열어젖히는 명 문장 중 하나가 아닐까 여겨진다.
다른 슬픈 스토리가 있다. ‘자기 앞의 생’이다. 모모가 주인공이다.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가 있나요?” 하는 말이 중심어이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는 태양아래 그를 가장 따뜻하게 보호해 주는 가족 같은 사람이다. 모모만 유일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를 한없이 사랑하던 로자 아줌마는 세상을 떠난다. 모모는 이제 죽음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진 정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 소멸된 환경에서 더 이상 사랑할 대상이 없이 살 수가 있냐고 친한 할아버지에게 묻는 것이다. 이 슬픈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우리 앞에 놓인 생을 어떡 허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리라. 좋던 나쁘던 슬프던 주어진 생은 진행되는 것 이란다. 그것을 헤쳐 나가는 힘은 오직 사랑을 받았다는 생의 기억이다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이다. 제제라는 어린아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다. 그러다 모두가 보잘것없다고 버려진 오렌지 나무에 정을 붙였다. 밍기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그리고 처음에 그가 싫어하던 동네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제제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고 아빠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무한의 사랑을 베푼 아저씨가 되었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 제제에게 던져진 슬픔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슬픔으로부터 회복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아저씨의 사랑 덕분에 제제는 슬픔을 이겨내는 법을 알게 된다.
간단히 언급했던 슬픈 이야기를 오래 마음속에 간직한 체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 주제의 글을 쓴 직접적 이유는 며칠 전 읽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보고서였다. 어떤 슬픔의 공통분모를 연상하게 되었다. 나를 가장 슬프게 했던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조합하려는 생각이 문득 들게 만들었다. 슬픈 내용이 이상하게 모두 어린아이들이 슬픔의 주인공이고 그들을 통해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아이들은 원래 천사와 같다. 하늘나라에 들려면 너희는 아이들과 같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 글을 쓰면서 손수건이 필요했다. 나는 눈물이 눈주위를 넘치는 것을 흡수하는 물건을 자주 손에 쥐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