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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을 이기는 자는 없다

(프랑스 대혁명과 빵의 연관)

by evan shim


빵 이야기, 빵이 불 붙인 혁명



역사는 커다란 물줄기 같으나 때로는 우연의 산물로 경로를 달리 잡기도 한다. 전문적으로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도 가끔 가정을 즐겨 쓴다. 대표적으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으면 등의 가정을 하기도 한다. 역사적 사건의 원인 등을 분석하는데 직접 원인도 있고 간접적인 원인도 있다. 어떤 분석의 잣대를 들이대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유일하게 大자가 붙은 혁명이다. 프랑스는 현재 연금개혁을 둘러싸고 사회적 진통을 겪고 있다. 시위대들이 들고 있는 전단을 보니 ‘우리는 루이 16세도 처단했다’는 것이 보여 섬뜩해 보인다.

프랑스 대혁명을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빵에 대한 욕구로 분석 잣대를 들이대 보았다. 혁명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프랑스는 심각한 식량부족을 겪었다. 따라서 끓어오른 민중의 분노는 거의 목에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프랑스는 왕립 제빵아카데미를 설치했고 빵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연구를 하였다. 기근이 오래 계속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빵학교에서는 대체 식량으로 감자를 경작하자는 대안을 내놓았지만 여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아 흐지부지되었다. 밀 대비 감자는 단위면적당 식량 생산능력에 큰 차이가 있었다. 만일 당시에 제빵학교의 추천대로 감자를 본격적으로 경작했더라면 극단적인 기아상태를 상당히 해결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민중의 분노도 줄어들어 프랑스혁명이 안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당시 처절한 기아상태에 내 몰린 민중들은 선동가들이 내놓은 유언비어를 사실인 냥 믿었다. 바로 정부와 결탁하여 폭리를 취하는 곡물상인이 식량부족의 배후에 있다고 판단했다. 루이 15세가 영국으로부터 수십만 파운드의 뇌물을 먹고 이 사태를 조장했다고 음모론까지 확신하는 민중도 많았다. 거기다 혁명이 발발하기 전에 급기야 빵 가격이 거의 3배로 뛰어올랐다.


드디어 참지 못한 민중은 혁명을 일으켰다. 폭도들은 바스티유로 가자 했는데 거기에는 많은 밀이 저장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벽을 폭파하고 내부를 다 뒤졌지만 어떤 곡식도 거기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한번 불붙은 폭동은 귀족과 기득권을 겨냥했고 이들은 거의 모든 특권을 내려놓는다고 했다. 소작농에 대한 영주들의 특권도 철폐했고 성직자들까지 오죽했으면 십일조까지 다 없애 버렸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파리는 완전히 무정부 상태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루이 16세가 기거하는 베르사유 궁으로 가자. 거기는 산더미처럼 식량이 쌓여 있다” 외치고는 군중들은 궁으로 향했다. 군중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을 느낀 국왕은 궁을 개방했다. 흥분한 폭도들은 온 궁을 다 뒤졌지만 실망스럽게도 빵은 나오지 않았다. 닭 대신 꿩이라고 그들은 국왕과 왕비를 파리로 압송했다. 이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으로 알려진 파리코뮨이 들어섰지만 그들도 단기간에 빵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거친 보리빵 대신에 흰 빵이라 불리는 밀 빵을 만들었고 식량 배급제를 실시했다. 가족 수에 맞게 무료 배급도 실시했다.


화가 난 주부들은 공회당에 난입하여 회의를 하던 의원들을 폭행했고 달아나던 일부 의원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 미증유 혁명의 와중에 최대의 수혜자는 나폴레옹이었다. 결국 그는 통령을 거쳐 황제가 되기까지 했다. 빵에 대한 국민들의 기아문제를 가장 관심 있게 해결하자고 했고, 기아가 닥쳤을 때는 길거리에서 수백만 분의 수프를 끓여 민중의 기아를 해결하려 했다. 나폴레옹 시절에는 오직 밀만 경작되었고 양질의 빵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시기가 다시 좋아져서 황제 취임 초기에 빵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나 기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외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주도하여 유럽에서 1850년대까지 가장 큰 곡물 공급원이었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가 적대 진영에 연합하였다. 그리고 곡물의 수출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이 보는 해결책은 전쟁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러시아를 직접 원정하였다. 프랑스 기병을 선봉으로 하여 전격전으로 모스크바를 거의 다다르게 되었다. 조그마한 문제는 진격이 하도 빨라 병참 마차가 오히려 늦게 도착할 정도로 일사천리로 모스크바 함락이 되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화해를 전하러 오는 러시아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정말 커다란 문제가 봉착하였다. 러시아를 점령하면 현지에서 병사들의 식량문제가 해결된다는 전략에 따라 더 이상의 식량공급을 준비치 못한 중대 실수였다. 러시아 군은 퇴각하며 모든 식량을 가지고 후퇴를 했고 가져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소각을 해 버렸다. 거기다가 온난한 프랑스 병사들에게 닥친 세기의 혹한은 더 이상 병사들이 생존이 어려워졌다. 식량이 다 떨어지자 기병대의 말까지 잡아먹는 현실이 되었다.


전쟁사에 남을 정도로 최악의 식량난이었다.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불가했고 퇴각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62만 명의 병사 중 온전히 귀환한 병사는 채 30만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폴레옹 시대는 저물어 갔다. 빵으로 시작한 나폴레옹의 시대는 이리 빵으로 마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원정을 가며 총리대신에게 절절한 편지를 썼다.


“ … 짐은 국민이 빵을 제대로 먹기를 희망하오. 값싸고 질 좋은 빵을 말이요.

내가 프랑스를 떠나 있는 동안 정부가 가장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사회안정이요.

빵은 사회를 안정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마시오”.


그러나 총리는 근본적 해결책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누구도 못한다.





PS. 퇴각하는 길에 어떤 부대가 우연히 농가에서 감자 3알을 발견했다. 눈이 뒤집힌 병사들은 그것을 서로 먹겠다고 전 중대원이 전투를 벌였다. 퇴각 시의 기록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이후에 히틀러도 식량확보 차원으로 러시아를 침공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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