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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shim Oct 17. 2023

다시 야만의 시대로 가나

(문명의 시대는 착각이었나)



era of barbarism : a periods of time that is associated with cruel and violent behaviour


세상의 시계가 거꾸로 가는 것일까?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은 이제 풍요와 자원 잉여의 시대에 도달했다. 적어도 햇빛 에너지가 아직 덜 비추는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그렇다는 말이다.  21세기 최고 문명의 혜택을 누르고 있어 자칫 동시대 인류 모두가 고난의 시기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갈등이 터지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결국에는 드디어 무시무시한 포화를 동반한 진짜 불똥이 튀고 있다.


지난 일요일 미사에서 들은 강론  사제가  말이 오래 머물렀다. 문명의 시대가 가고 야만의 시대가 다시   같다는 말씀이었다. 실증적 사례를 부언하다 보니 현재의 가자지구 사상자 이야기도 있었고 역사적으로 알려진 아르메니아 대학살 사태도 언급하였다. 며칠이 지나갔지만 이야기의 잔상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어제 영어대화를 가르쳐 주는 외국인 전화 선생과 우연히 이야기하다가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또한 현재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갈등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을 공통적으로 느꼈다.


원래 불행은 연속적으로 발생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2년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했을  세상은 한차례 식량과 연료의 부족 등으로 물자공급 네트워크가 어려움을 겪었다.  여파 때문인지 모든 물가가 앙등하여 생활 유지가 어려워졌고, 세상 대부분의 국가 경제 성장률이 저하되는 고난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제 다시  다른 화약고인 중동 지역에서도 전쟁이라는 양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여기는 중동지역 특유의  국가 연합 세력이 미묘한 균형을 이룬 곳이라 확전의 파장이 어디까지 일어날지 예측이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우리는 남과 북이 상호 대치하는  전시상태에서 살고 있어서 다음은 어디일까 (what’s next)에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없다.




전쟁의 양상이 더러운 전쟁화 (dirty warfare) 되고 있는 것도 우려할 만하다. 전쟁은 원래 군복을 갖춰 입은 정규군을 중심으로 일차적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양상이었다. 맞는 비유인지 모르지만 과거 전투는 주로 평야에서 양측이 민간들이 없는 곳에서 수행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한쪽에서는 전투가 벌어지지만 다른  켠에서는 농부들이 조심하며 추수를 하는 모습도 상상이 가능했다. 나폴레옹 마지막 전투도 그랬고  남북전쟁 시 전투 양상도 유사했다.


그러던 명예적 전투원칙이 근래에는 작동하지 않고 민간인을 포함한 누구나를 향한 무차별 포화전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전 세계가 우려하는 것이다. 의도적임을 의심할 정도로 민간인을 향한 대공포가 작열하고 있다. 포화는 학교, 병원, 주택가 등도 예외적이지 않다. 과거 역사적 전쟁에서 최소한의 명예를 존중하는 전쟁은 부분적이지만 존재하기도 했다.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도 적인 전쟁이 있었지 현재와 같은 더러운 전쟁은 찾기 힘들었다.







21세기가 분명 과거 어느 때보다 문명적으로 발전했고 기술적으로 엄청나게 진보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야만적 전쟁 발발은 우리가 과연 문명세계에 진입해 있는지, 과연 인류가 몰라보게 진보되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없다. 또한 인종 갈등, 정치적 분열, 계층에 대한 분노, 국제 갈등 등으로 우리 사회가  이상 문명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  이런 현상이 근현대로부터 시작했을까 궁금해진다. 국제정치와 국제관계는 고도로 복잡해지고 자국 이익이 모든 것의 판단 기조가 됨으로써 해결 방안이 매끄럽지 않고 오히려 도전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게  것으로 유추해   있다. 특히 강대국 간 이익의 충돌, 국제 분쟁의 조정 틀의 불완전성, 국제 정의에 대한 공헌 부족으로 야기되는 국제정서의 혼미가 이를  악화시킨다.


차라리 중세 교황권이 세속 권력보다 막강하여 권위적 지위를 무기로 세상 문제 조정력을 발휘하던 시대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현대 국제 시스템은 국가 간의 주권과 독립성을 존중하는 원칙에 근간을 두고 국제 정의와 협력을 위한 다양한 구조와 노력이 존재한다. 국가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권한 있는 국제기구와 국제 협상의 강화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그러나 마치 1차 대전 이후의 국제연맹과 같은 정도의 미미한 영향력으로 국제 분쟁 해결은 난망하다.






과거 독일 철학자 칸트가 한 제안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철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이 말을 오래전부터 잊지 않고 있었던 경구였다. 칸트는 평화와 국제관계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지은 책에서 그는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방안으로 제시한 이론 중 하나이다. 소위 세계시민이 해야 할 자세를 알려주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전쟁을 결정하는 권한은 국가 지도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결정을 위한 공공적인 토론과 국민의 의견을 고려하여, 전쟁 결정을 내릴 때 국민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땅에 사는 국민들의 민의를 묻지도 않고 그들 소수의 정책 입안자들이 밀실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고 다 함께 결정을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한 세계시민적 시각인데, 이를 통하여 전쟁 결정을 국민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전쟁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국가 원수가 아니고 국민 각자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쉽게 말하자. 막말로 영토를 배로 늘려도 서민들이 먹는 밥은 똑같은 법이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국민들이 그들의 미래를 직접 결정하는 시도인데, 이의 발제는 민주주의 원리와 국제평화를 위한 기본적 토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마무리를 한다. 우리 세계 시민들도 현재의 국제 정세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대응이 중요하다 하겠다. 국내외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과 교육이 필요하다. 평화를 지지하는 시민단체나 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여야 한다. 소위 시민들의 목소리도 내야 한다. 필요하면 정치에도 참여해서 시민들의 영향력을 만들어야 한다. 옳은 투표, 정치적 대화 그리고 정책제안이 뒤 따르면 더욱 환상적이다.


지금보다 3세기 전에 칸트가 세계시민으로 서의 올바른 태도를 제시한 것이 정작 그때보다도 지금 더 필요한 것이다. 깨어 있는 의식이 중요한 것은 그 방향이 우리를 위하고 우리의 후손을 위한 옳은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는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달렸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 에 따라 21세기는 우리가 찾는 최고의 문명시대로 기록될 것인지 아니면 착각의 시대로 남을 것인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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